책읽는사회

소크라테스의 변명-진리를 위해 죽다[안광복]

盜跖 2012. 6. 2. 23:13

소크라테스의 변명
-진리를 위해 죽다

안광복 풀어씀
사계절, 2004


 

 


끊임없이 묻고 또 묻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과연 무엇을 가르쳤을까? 놀랍게도 그는 아무 것도 가르친 것이 없다. 그는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을 뿐이다. 그는 질문받은 사람이 스스로 답변하는 가운데 자신의 독선과 무지를 깨닫게 했다. 그는 '깨달음을 낳게 하는 산파'였다.

살찐 말을 꺠우는 등에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아테네라는 혈통 좋은 살찐 말을 깨우는 등에'이고자 했다. 등에는 말이 잠들지 못하게 자꾸만 물어뜯고 귀찮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제 잘난 생각에 '독단의 잠'에 빠져 타락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무지를 깨우치려고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민주주의

 

민주주의 제도란 어린 아이들에게 쓴 약을 먹을 것인지 사탕을 먹을 것인지를 투표하게 하는 것과 같다.

 

논리적 화법의 효율적인 학습 방법

 

트로이를 발견한 슐리만은 고고학자로서뿐만 아니라 6개 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했던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학교라는 곳을 거의 다녀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그처럼 외국어를 잘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슐리만의 비법은 간단하다 못해 무식하기까지 하다. 그의 방법은 '무조건 외워 버리기'였다. 문법, 단어 가리지 않고 무작정 암기, 암송하다 보면 어느덧 '감'으로 어법과 단어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이처럼 항상 비판받고 있기는 하지만 암기는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오래 된 학습법이며 나름대로 효과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헛똑똑이들에게 주는 가르침

 

논리학에서는 이것을 '사람에게 호소하는 오류'라고 한다. 내가 아는 사람이 상품을 설명하면 모르는 사람이 할 때보다 훨씬 믿음이 가는 법이다. 그러나 조금만 따져 보면 아는 사람이라는 것과 상품의 품질은 서로 다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니까 믿을 수 있겠지."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호소하는 오류'이다.
우리는 이 오류를 자기 자신에게도 많이 범하곤 한다. '나는 유명인이니까 이 분야에서도 한마디 할 수 있겠지.'라거나, '내가 선배니까 무슨 일에서건 후배들에게 한마디 할 수 있는 거야.'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렇다. 결국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자신의 무지함과 한계를 알고 항상 겸허한 마음을 지니라는 뜻이다.

 

다수의 견해는 언제나 옳다?

 

하지만 다수의 선택이 항상 정의이고 최선의 방안인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다수의 선택을 따랐다가 잘못된 경우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게다가 민주적인 토론과 결정은 관료들의 책임 회피 수단으로 이용되기까지 한다. '사람들이 원했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해 민주적인 절차를 이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프랑스의 드골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자신의 진퇴를 묻는 국민투표를 했다. 사실,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까지 갈아치우자고 나서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최고 권력자가 무너진 데서 오는 엄청난 혼란은 누구에게나 두렵다. 그래서 선거는 재신임 쪽으로 결론나곤 했다. 드골은 그렇게 얻은 선거 결과를 늘 면죄부로 삼았다.

 

포퓰리즘, 민주주의의 아킬레스건

 

소크라테스가 볼 때, 군중 주도의 민주주의란 바보같은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도 한심한 인간이면서 '국민의 한 사람'이란 이유로 정치가들을 욕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민주주의란 뛰어난 사람이나 덜 떨어진 사람이나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는 이상한 제도이다. 게다가 돈과 미디어로 여론을 왜곡하는 일도 적잖게 일어난다.
사정이 이렇다면 "말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은 말을 타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조련) 전문가이다."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는 어리석은 다수를 따르기보다 정말로 현명하고 정의로운 자를 따르는 사회가 더 완벽하고 올바르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술

 

논박술의 핵심 기술은 '모순'에 있다. 상대방의 주장을 기초로 논리를 전개해 보면 마침내 원래의 주장에 정반대 되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블라스토스라는 걸출한 학자는 이 논박술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한다.

1. '갑'은 A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2. 소크라테스는 계속 질문을 던지며 '갑'이 B와 C(필요하면 D,E,F...식으로 계속)를 받아들이게끔 한다.
3. 그런데 B와 C는 A와 모순되는 것이다.
4. '갑'은 B와 C를 분명하게 받아들인 상태라 원래 확신하던 A라는 믿음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5. 따라서 '갑'은 A라는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상주의의 빛과 그늘-소크라테스라는 소금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모든 비판을 불가능하게 하는 '닫힌 사회'의 원흉이라 지적한다. 절대적인 진리는 절대악을 낳을 뿐이다. 확실히 소크라테스에게는 이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얕잡아 보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사회질서가 확고하고 도덕이 바로 선 사회라면 소크라테스는 시장통 사람들에게조차 쓸데없이 오와 열을 맞추라고 소리를 질러 대는 별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다. 반면, 가치관과 질서가 무너져 제각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상황에서는 소크라테스같이 원칙과 이상을 강조하는 사람이 올곧은 지도자라 할 만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목숨 바쳐 투쟁한 항일 운동가들은 존경할 만한 지사이지만, 오늘날에도 일본 제품을 쌓아 놓고 불질러 대며 애국심을 외치는 사람들은 '광신적 민족주의자'로 여겨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악법도 법이다-억울한 오해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결코 불의에 승복하는 사람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말하곤 했다. 적군에게 끝까지 몰리자 스스로 자결해 버린 군인의 행위는 '자살'이라기 보다는 '저항'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이런 성격일 것이다. 그의 죽음은 불의에 결코 따르지 않는 자신의 철학을 완결 짓는 느낌표와 같았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소크라테스의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아테네에서 유명한 산파였다.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진리라는 아기를 낳게 하는 남자 산파'라며 은유적으로 소개한다. 산파는 아이를 대신 낳아 주지는 않는다. 산모가 아이를 잘 낳도록 도와 줄 뿐이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는 '학습자가 스스로 진리를 낳도록' 거들어 준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방법을 '산파술'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결코 무엇을 직접 가르치고 설명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