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강명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2007 푸른역사
조광조(趙光祖)는 성리학적 윤리로 조선의 모든 인간을 윤리적 인간으로 만들려 하였다. 이른바 조광조로 대표되는 기묘사림은 "소학', "삼강행실도" 등 막대한 분량의 다양한 윤리서를 찍어내어 보급하는 것을 최대의 과업으로 삼았다. 이어 최계와 율곡은 자신들의 시대에 비로소 인쇄, 보급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정독하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었다.
정도전 "삼봉집(三峰集)"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置書籍鋪詩'
금속활자에는 대량의 인쇄물을 신속하게 찍어내어 일부에게 독점된 지식을 해방시키는 근대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의 금속활자도 과연 그러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조선의 금속활자는 대량의 인쇄물이 아니라, 오로지 다종의 인쇄물을 짧은 시간에 얻는 데 목적이 있었다. 금속활자의 사용을 보편화했던 세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좌전(左傳)"은 학자들이 마땅히 보아야 할 서적이다. 주자로 인쇄한다면 널리 반포하지 못할 것이니 '목판'에 새겨 간행하라(세종실록 13년 2월28일)"
-율곡 이이의 독서 예찬
<자경문自警文>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 나절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낮 동안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아무 일이 없으면 마음을 내려놓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일 처리에 마땅한 방도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독서를 한다. 독서란 옳고 그름을 분변分辨하여 일을 행하는 데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오똑 앉아 독서만 한다면, 무용한 학문이 된다.
율곡이 권장한 기본교과서
소학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 (사서대전-주자의 주해) 여기에 대학혹문을 더하면 오서대전이 된다
오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오경대전-주자의 주해)
--->주자의 경전 해석만을 정통 해석으로 인정한다는 말
오서와 오경을 돌려가며 익숙하게 읽고 이해하기를 멈추지 않아 의리가 절로 밝아지게 만들어야 하되, 송대의 선현들이 저술한 "근사록", "가례", "심경", "이정전서", "주자대전", "주자어류" 등을 틈틈히 정독하여, 어느 한순간도 끊어짐이 없이 의리가 항상 내 마음에 젖어들게 해야 한다. 여유가 있으면 역사책을 읽어 고금의 역사적 변화에 통달하여 식견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단 잡류의 책은 한순간이라도 펼쳐 보지 않아야 한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의 책 모으기
다만 지나칠 정도로 책을 좋아하여 음악이나 여색에 빠진 것과 같았다.
"선조수정실록" 10년5월1일 유희춘의 졸기 중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면서 고려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적과 조선 건국 이후 2세기 동안 생산된 방대한 문헌들이 하루 만에 잿더미가 되었고, 전국 각 지방 관아에서 축적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목판들도 남김없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실록"의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 역시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쓸쓸하게 허공으로 날아갔다.
자, 이제 무엇으로 "실록"을 쓸 것인가. "미암일기眉巖日記"란 책이 있다. 미암 유희춘(1513-1577)이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 동안 쓴 일기다. 이 개인의 일기는 너무나 치밀하고 방대해 마침내 "선조실록"의 뼈대로 채택된다. 개인의 성실한 하루하루의 기록은 이처럼 한 시대를 증언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모두 이 시간부터 일기를 쓰는 것이 어떠한가.
책에 관한 가장 악질적인 행태를 보여주는 곳은 귀중도서의 목록을 만들어서 귀중한 책을 소장하고 있노라 세상에 자랑해 놓고는 그 자료를 좀 이용하자고 하면, 안면 바꾸고 절대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는 모모한 도서관이다.
坊刻本 - 민간에서 출판한 책
頒賜 - 임금이 녹봉이나 물건을 하사해 주는 것
後刷本 - 같은 목판으로 뒤에 다시 찍어낸 책
화매 - 책을 파는 사람이 사는 사람과 값을 합의해서 파는 행위
-세상의 모든 것, 이수광의 지봉유설
"지봉유설芝峰類說"은 특별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 지봉의 독서와 메모의 결과일 뿐이다. 다만 그 독서와 메모는 너무나 광범위하다. 이수광은 1614년 52세 때 이 책을 탈고한다. 자신이 작성한 범례에 의하면, 이 책은 3,435조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등장하는 인명은 2,265명에 달한다. 방대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인용한 서적의 저작자는 무려 348명이다. 생각해 보라. 348명의 저작자가 얼마나 거창한 규모인지는 책을 써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유서類書는 여러 문헌에서 발췌한 지식을 유사한 내용끼리 분류해서 묶은 책을 뜻한다.
성리학이 성과 이, 기와 같은 추상화된 언어를 도구로 삼아 오직 관념의 조작에 몰두한다면, "지봉유설"은 지시 대상이 분명한 현실의 구체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성'과 '이'와 '기'를 가지고 아무리 사고한들, "곤여만국전도"에 나타난 서양의 존재를 설명할 수는 없다. "지봉유설"의 세계는 성리학과는 대척적 공간에 놓인 지식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贅言 :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 췌담(贅談). 췌론(贅論)
-허균이 만든 가짜 책과 이단 시비
사람됨이 경망하여 볼 것이 없다. 선조실록 31년10월13일
행실도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 선조실록 32년5월25일
어머니가 원주에서 죽었는데도 강릉의 기생에게 빠져 분상奔喪하지 않았다. 선조실록 37년9월6일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뭇 서적에 박통搏通하고 글을 잘 지었다. 선조실록 31년10월13일
오직 문장의 재주로 세상에 용납되었다. 선조실록 32년5월25일
허균의 문재가 극히 높아 붓만 들면 수천 마디 말을 써냈다. 그러나 거짓 글을 짓기를 좋아하여 산수참설山水讖說과 선불이적善佛異迹으로부터 모든 글을 가짜로 지어냈는데, 그 글이 평상시의 작품보다 월등 나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분해낼 도리가 없었다. 이제는 나라를 비방하는 문서까지 만들고, 자신이 또 그것을 해명하는 글을 지어 공功을 바라는 바탕으로 삼았으니, 그 계책이 지극히 교묘하다 하겠다. 광해군일기 6년10월10일
이탁오는 알다시피 양명좌파陽明左派다. 양명좌파는 양명학의 분파 중에서 가장 과격한 사상가의 부류다. 주자학이 인간 외부에 초월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진리에 인간 개인의 의식과 행위를 맞추어야 한다고 역설했다면, 양명의 '심즉리心卽理'는 진리가 인간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음을 말한다. 미음이 곧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는 곧 개인의 내부에 각각 존재하게 된다. 이제 객관적·초월적 진리는 무너지고, 진리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됐다. 이탁오는 이 진리의 주체적 자각이란 사유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바, 그 마지막 극단에서 유가, 불가, 도가의 경계가 희미해지게 됐다. 곧 특정 종교나 교학체계의 진리만을 진리로 인정하지 않고,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서藏書"는 이 상대주의적 인식을 역사에 적용한 책이다.
허균이 죽지 않았다면, 우리의 사상사는 얼마나 더 풍성해졌을까. 재능있는 사람을 죽이는 사회란 정말 끔찍하다. 허균이 자신의 재능을 주체하지 못해 경박스럽게 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천재를 용납하지 못하고 비난으로 일관하다가 마침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조선 사회는 더더욱 경망하다.
-이단 아닌 이단자 박세당
서계西溪 박세당朴세世堂은 왜 주자학의 이단으로 몰리게 됐을까?
이단은 경전의 해석에서 생긴다. 경전이란 무엇인가. 경전은 다른 사람 앞에서 무언가를 말한, 즉 최초의 발언이란 영광을 쓴 텍스트일 뿐, 태어날 때부터 거룩한 텍스트는 아니다. 다만 뒷날 거룩하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경전의 의미가 곧 주석가가 주장하는 의미란 등식은 필연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지 주석가의 주장일 뿐이다. 그렇다면 주석가의 주장이 진리가 되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인가. 주석가의 주장이 권력과 결합해 비판의 목소리를 뭉갤 수 있으면 진리가 된다. 진리를 만드는 것은 논리적 정합성이 아니라, 오로지 권력일 뿐이다.
주자는 경전에 주석을 달면서 가필에 문장의 위치까지 마음대로 바꾸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경전에 대해 체계와 질서를 부여했다. 그러나 "사서집주四書集注"를 읽다보면 주석을 다는 것은 경전의 원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주석가가 경전을 빙자해서 자신의 경전을 새로 쓰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박세당이 꿈꾸는 세상이 송시열이 꿈꾼 세상과 달랐을 것 같지도 않다.
장유張維는 인조 10년(1632)에 저술한 "계곡만필"에서 중국에는 양명학·불학 등 여러 학문이 있지만, 조선 사람들은 성리학밖에 모른다고 개탄했다.
-장서가 이의현의 책자랑
조선의 지식계와 서적시장이 워낙 협소해서 거창한 서적의 출판이 애당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 파견되었던 사신단이 서적 구입에 골몰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가하게 쓴 방대한 사전-이익의 성호사설
이익의 "성호사설"이 당시 현실을 고민하는 많은 지식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있었던 것은, 백과사전식의 단순 나열을 넘어 방대한 독서에서 나온 깊은 성찰과 개혁사상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해로운 것은 습속이 과거科擧의 학에 물든 것이다. 천하가 물결에 휩쓸려가듯 어려서부터 늙어질 때까지 귀와 눈에 젖은 나머지 벗어날 수 없이 되어 있다. 이것은 물욕만이 그 주된 동기가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정말 아주 유감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 있는 것 같다. 자식을 낳아 똑똑하면 선한 일을 하는 군자가 되어 세상을 돕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데도, 이런 일은 팽개치고 7,8세가 넘기만 하면 반드시 전箋·표表·시詩·부賦의 사람의 본성을 해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자 익혀 그 마음을 굳혀버리는 것이다. 나는 또한 이런 줄을 알지만 어떻게 할 방법을 모른다.
'과학해도科學害道', "성호사설" 제26권 경사문
후세의 당쟁의 화禍는 대개 과거를 너무 자주 보여 사람을 지나치게 많이 뽑은 것이 그 이유
'탕평蕩平', "성호사설" 제11권 인사문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마다 베푸는 경과慶科를 두고 그는 '과거와 경사가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고 비판한다. 또 과거 합격자는 몇몇 권문세가의 자제들뿐이고, 사방의 한미한 선비는 합격자에 끼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사장詞章, 곧 한시나 부賦와 같은 문학으로 국가를 경영하는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잘못된 일임을 통렬히 비판한다.
또 같은 글에서 "게다가 시골 사람은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적이 풍부하지 않고, 식견이 넓지 못하니, 습속과 기풍氣風이 어찌 서울 사람의 수준과 같아질 수가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과거 합격자가 발표되면, 서울의 귀한 집 자식들이 열 중에 여덟, 아홉을 차지한다. 이것을 보고 재주와 덕행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서울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어찌 옳은 말이랴?"라고 말한다.
'사과詞科', "성호사설" 제11권 인사문
이제 문벌을 숭상하고 자기 당파를 만드는 버릇이 뭉쳐져 한 덩어리가 되어 있지만, 원래 조정에서 벼슬하는 여러 신하들은 먼 사방에서 와서 모인 사람들이라, 그 신분 처지가 각각 달랐고 기습氣習도 같지 않았던 것이니, 그 시초에 붕당이라고 지적할 만한 것이 있었으랴?
지금의 벼슬을 하는 자들은, 종당宗黨과 혼인 관계를 맺지 않음이 없어 마음과 마음이 서로 들어맞고 하는 일마다 단단히 결탁해 대대로 벼슬을 독차지 하니, 원수와 제 편을 가르는 버릇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닌 것이다.
이 고질痼疾은 골수에 박힌 것이다. 모두 죽고 나서야 없어질 것이니, 아무리 명철한 임금이 세상을 다스린다 해도 쉽사리 그 분란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가닭에 철없는 애와 같은 자들이나 멍청한 인간들이 이어 벼슬을 한다고 나서니, 백성이 겪는 고통은 무관심하게 버려두고 마는 것이다.
'천발견묘薦拔畎畝', "성호사설" 제10권 인사문
백성을 이끈다는 것은, 말로 하거나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해치거나 겁탈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싫어하고 살기를 즐겁게 여기도록 하며, 선을 향하고 악을 피하도록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저들은 본디 지혜와 능력이 있어, 산택山澤의 이익을 잃지 않을 것이니, 마치 물을 도랑으로 끌어대면 웅덩이를 가득 채우고 먼곳까지 흘러가고, 말을 몰아 목장으로 넣으면 물과 풀을 찾아 말이 스스로 다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지금은 거대한 토지가 깡그리 권세가의 호강豪强한 자들의 소유물이 되고 말아, 백성은 일년내내 부지런을 떨어도 받는 것은 겨우 절반쯤이고, 또 여기서 국가에 바치는 세금과 여타 잡세도 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노동력을 쏟았지만 차지할 수 있는 것은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른 이의 남는 땅을 얻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가난한 백성은 자신의 노동력을 쓸 곳조차 없다. 이런 까닭에 내가 사방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닐 적에 촌가村家에서 묵으며 곰곰히 살펴보았더니, 방 안 단지에는 저축한 곡식이 없고 횃대에는 걸린 옷이 없었다. 남편과 아내가 팔을 베고 굶주림을 참을 뿐이었다. 이런 고통은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일하였다.
'생재生財', "성호사설" 제8권 인사문
성호사설이야말로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의 극한치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성호사설은 인쇄되지 않았지만 전사轉寫되어 읽히면서, 격한 찬반논쟁을 일으킬 만큼 영향력이 컸다.
정약용丁若鏞이 귀양지 강진에서 아들 정학연丁學淵에게 일러준 책읽기 과정
자질구레한 시율詩律은 비록 이름이 난다 해도 쓸데가 없다. 모름지기 올해 겨울부터 내년 봄까지는 "서경"과 "좌전"을 읽을 것이다. 두 글은 문장이 억세고 난삽하여 뜻이 깊지만, 주해가 있으니 차분하게 연구하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여가에는 "고려사", "반계수록", "서애집", "징비록", "성호사설", "문헌통고" 등의 책을 읽어 요점을 초록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홍대용, 베이징 유리창에 가다
홍대용의 베이징행은 평지돌출격의 사건
건정동에서 홍대용과 엄성嚴誠, 반정균潘庭均이 만난 사건은 조선 후기 지성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조선 건국 이후 수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압록강을 건너 베이징 땅을 밟았지만, 이렇게 개인과 개인이 만나 담화한 적은 없었다.
이들과의 담화를 기록한 것이 "담헌서"의 '건정동필담乾淨동筆談'이다.
중국에도 주자鑄字와 철판鐵板이 있는지요?
모두 목판을 쓰고, 철판과 주자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홍대용이 베이징 지식시장에서 경험한 충격으로 낙후된 조선을 개혁할 학문, 곧 실학을 궁리했다면, 정조는 뒷날 베이징에서 수입된 책이 조선의 지식인을 오염시키고 주자학을 해체한다고 판단해, 베이징의 서적의 수입을 금지했다. 그리고 지식인들의 저작을 검열해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동일하게 베이징에서 수입된 서적을 읽었지만, 홍대용과 정조가 나아간 방향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책 읽는 바보 이덕무
이덕무는 서파庶派였다. 자신이 서자라는 말이 아니다. 그의 직게를 거슬러 올라가 서자가 있으면 자동으로 그 후손은 서파가 된다.
나는 늘 예나 지금이나 인가人家의 자제들이 밀랍을 먹인 종이로 바른 창문에 화려하고 높은 책상을 두고, 그 옆에 비단으로 장정한 서책들을 빽빽하게 진열해놓고서, 자신은 복건을 쓰고 흰 담요 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기침이나 캉캉 뱉다가 한 해가 다 가도록 한 글자도 읽지 않는 것이 가장 유감스럽다.
이덕무는 독서에 골몰하는 자신을 간서치看書癡, 곧 '책 읽는 바보'라 불렀다.
이덕무는 가난뱅이로 소문난 인물이다. 엄동설한에 땔감 란 뭇이 없이 추위에 잠을 못 이루다가 "한서漢書"와 "논어"를 꺼내어 병풍으로, 이불로 사용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책을 실은 배가 강남江南에서 와 통주通州 장가만張家灣에 정박했는데, 모레 이곳으로 실어올 것이다. 모두 4,000권이다."
도씨는 사고전서관에 책을 납품하는 상인이었다. 그가 운하를 통해 배로 책을 베이징으로 실어온 것은 바로 책의 납품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라. 일개 서점이 책을 배로 실어 운반하다니! 조선 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연암의 문학은 어디서 왔을까
시詩는 자하紫霞에게서 망했고, 산문은 연암燕巖에게서 망했으며, 글씨는 추사秋史에게서 망했다.
연암의 위대함은 그의 독창성에서 왔다고 말한다.
원굉도 이전 중국 문단은 진秦나라 이전의 산문과 한漢나라의 산문을 전범으로 삼아 산문을 창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파, 곧 의고문파擬古文派가 있었다. 의고문파가 문단을 휩쓸자, 이에 반대해 당나라와 송나라의 산문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유파, 곧 당송파가 등장했다. 당송파의 주장은 의고파의 주장에 비해 설득력이 있었지만, 이 역시 당·송 산문이란 전범을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의고파와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 이착오 사상의 세례를 받은 원굉도가 등장한다. 원굉도는 숱한 비평문에서 절대적 전범은 존재하지 않으며, 문학은 오로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사유와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탁오가 절대진리인 '이理'를 부정했듯, 그는 절대전범의 설정을 부정했던 것이다.
연암의 사유를 꼼꼼히 검토하면 양명좌파인 공안파의 사유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책을 탄압하는 호학의 군주, 정조
명·청 이래의 문장은 난해하고 괴이하며, 뾰족하고 시큼함이 많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요즘 사람들은 명·청인의 문집 보기를 좋아하는데, 무슨 재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재미가 있는데도 내가 그 재미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
1785 추조秋曹(형조의 별칭) 적발사건
1791 진산사건
1791 정조는 베이징에서 패관소기稗官小記는 물론 경전과 역사서라도 중국판은 절대로 수입하지 말게 하고, 귀국 때 철저히 수색, 압수해 책을 국내에 유포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지시한다.
(문체와 사상의 오염은 중국 서적에 그 원인이 있다)
정조에 의하면 국내에도 경전과 역사서는 많이 있으며 지질이 질기고 글씨가 커서 보기 편한데도 굳이 종이가 얇고 글씨가 작은 중국판을 원하는 것은 "누워서 보기"에 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경서를 누워서 보는 것은 성인의 말씀을 존경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한다.
오늘날의 문풍文風이 이와 같은 것은 그 근본을 캐보건대, 박모朴某의 죄가 아님이 없다. "열하일기"는 내가 이미 숙람熟覽하였으니, 어지 감히 속일 수가 있으랴? 이 사람은 그물을 빠져나간 가장 큰 사람이다. "열하일기"가 게강에 돌아다닌 후에 문제가 이와 같아졌으니, 마땅히 결자結者가 해지解之해야 할 것이다.
정조는 박지원에게 "열하일기"와 같은 규모의 아정雅正한 다른 작품을 지어 올릴 것을 명했다. 그럴 경우 과거에 합격한 일이 없는 박지원에게 명예롭기 짝이 없는 홍문관·예문관의 제학提學 자리를 줄 것이라 회유했으나 박지원은 이를 거부했다.
문체반정은 사실상 사상투쟁이었다.(이단적 사유의 유통을 막기 위한 것)
근래에 중국을 휩쓸고 있는 학문은 왕수인王守仁과 육구연陸九淵의 여파로서 백사白沙(진헌장陳獻章)에게서 넘쳐나고 서하西河(모기령毛奇齡)에 와서 극단에 이르렀다.
-이옥과 문체반정
이옥의 문학적 동지였던 김려(1766-1822)가 이옥의 시와 산문을 수습해 놓았다. 김려는 구한말의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 일본에 파견되었던 수신사 김기수金綺秀의 증조부이기도 한 사람이다. 김려는 젊었을 때 자신과 같이 문학 활동을 했던 벗들의 글을 모아 "담정총서潭庭叢書"란 거창한 필사본을 엮었는데, 여기에 이옥의 작품이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나는 알겠노라. 푸른 것은 그것이 버드나무인 줄 알겠고, 노란 것은 그것이 산수유꽃·구라화인 줄 알겠고, 흰 것은 그것이 매화꽃·배꽃·오얏꽃·능금꽃·벚꽃·귀룽화·복사꽃 중 벽도화(碧桃花)인 줄 알겠다. 붉은 것은 그것이 진달래꽃·철쭉꽃·홍백합꽃·홍도화(紅桃花)인 줄 알겠고, 희고도 붉거나 붉고도 흰 것은 그것이 살구꽃·앵두꽃·복사꽃·사과꽃인 줄 알겠으며, 자줏빛은 그것이 오직 정향화(丁香花)인 줄 알겠다."[이옥의 ‘화설(花說)']
정조는 왜 이옥의 문장을 소품체라 규정하고 고치라고 닦달했던가. 정조는 소품을 두고, 자질구레한 것을 제재로 선택하여 세세하게 늘어놓거나, 도덕적으로 제어되지 않은 정서를 과도하게 표현하는 글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옥은 이렇게 말한다.
"서울 장안의 꽃은 여기에서 벗어남이 없으며, 이 밖의 벗어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볼만한 것은 못 된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때에 따라 같지 않고 장소에 따라 같지 않다. 아침 꽃은 어리석어 보이고, 한낮의 꽃은 고뇌하는 듯하고, 저녁 꽃은 화창하게 보인다. 비에 젖은 꽃은 파리해 보이고, 바람을 맞이한 꽃은 고개를 숙인 듯하고, 안개에 젖은 꽃은 꿈꾸는 듯하고, 이내 낀 꽃은 원망하는 듯하고, 이슬을 머금은 꽃은 뻐기는 듯하다. 달빛을 받은 꽃은 요염하고, 돌 위의 꽃은 고고하고, 물가의 꽃은 한가롭고, 길가의 꽃은 어여쁘고, 담 밖으로 뻗어 나온 꽃은 손쉽게 접근할 수 없고, 수풀 속의 꽃은 가까이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이런 가지각색 그것이 꽃의 큰 구경거리이다."
대체로 논하여 보건대 만믈이란 만 가지 물건이니 진실로 하나로 할 수 없거니와, 하나의 하늘이라 해도 하루도 서로 같은 하늘이 없고, 하나의 땅이라 해도 한 곳도 서로 같은 땅이 없다. 마치 천만 사람이 각자 천만 가지의 성명을 가졌고, 사백 일에는 또한 스스로 삼백 가지의 하늘이 있음과 같다. 오직 그와 같을 뿐이다.
모란과 작약의 풍성함과 요염함을 가지고 패랭이꽃과 수국을 버리고, 가을 국화와 겨울 매화의 고단함을 가지고 붉은 복사꽃과 살구꽃을 미워한다면, 이를 일러 꽃을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題桃花流水館小稿券後[김려]
나는 성균관에 주목한다, 성균관은 국가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처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발랄한 사고가 자라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조선 후기의 성균관은 과거 준비기관으로서 별 의미가 없는 곳이었다.
1797 강이천의 비어옥사飛語獄事
강이천은 강세황姜世晃의 손자다. 비상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불행하게도 어렸을 때 병을 앓아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장애인은 임금을 가까이 하는 벼슬을 하지 못한다.
-다산 정약용의 다작多作
다산이 저술한 책들은 하나도 간행된 것이 없고 개별적으로 서로 베껴 써서 책에 따라 각기 흘러다니고 있다. "흠흠신서", "목민심서"의 경우 더욱 지방행정과 형사소송에 절실한 내용이기 때문에 비록 당론이 다른 가문의 사람이라도 보배로 간직하지 않는 이가 없다. 지금 벌써 수백본이 나돌고 있는데 글자가 틀리고 빠진 것이 많아 읽을 수가 없다.(매천야록 상 108쪽)
황현 시대까지 다산의 저작은 오직 필사본으로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00년 현채玄采가 장지연·양재건 등과 광문사廣文社란 신식 출판사를 설립하고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현대식 활자로 인쇄, 발행하였으니, 20세기가 되어서야 그의 저작은 비로소 잉크의 맛을 본 것이다.
다산의 저작에 전서全書란 이름을 붙여 전집 형태로 출판한 것은, 1936년 신조선사가 간행한 "여유당전서"가 최초다.
다산의 저서는 집 높이만큼 되지만, 뒤에 중국인이 지은 책을 얻어보고 자신의 학설과 같은 것이 있는 것을 보면, 바로 자기가 지은 것을 꺼내어 삭제표시를 했으니, 진부한 학설을 답습하기를 부끄러워함이 이와 같았다.
홍길주, "표롱을첨(하)", 박무영·이주해 외역(대학사, 2006). 338면
근래 또 일종의 견해가 있어, "군서群書를 박람하면 점차 박잡駁雜한 병통이 생겨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숭상하는 병폐에 쉽게 빠진다"고 합니다. 허나 이것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패관소품稗官小品이나 이단잡학異端雜學의 책은 모두 물리쳐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 유가儒家의 정경政經 문자인 구경九經의 전석箋釋과 역대 사책史策같은 것들이야 어떻게 폐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산이 권기權夔에게 보내는 편지)
대개 책을 저술하는 법은 경적經籍이 종宗이 되고, 그 다음은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들에게 은택을 미칠 수 있는 학문이어야 하며, 외적을 막을 수 있는 관문이나 기구와 같은 것도 또한 소흘히 여길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한때의 농담을 취한 소소하고 변변치 못한 설과 진부하고 새롭지 못한 담론이나, 지루하며 쓸모없는 의론 같은 것들은 한갓 종이와 먹만 허비하는 것이니, 손수 진귀한 과일나무나 좋은 채소를 심어서 생전의 생계나 풍족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
-사대부의 이상적 삶과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서유구徐有구 역시 두말할 필요가 없는 벌열이요, 경화세족이다.
조정을 떠난 18년 동안 여섯 번 이사를 하면서 저술에 몰두. 그는 단 한 사람 아들 서우보徐宇輔의 도움을 받아 113권 52책이란 거질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탄생시킨다. '임원'이란 도시가 아닌 잔원, 곧 농촌이고 '경제'란 물질적 생활의 영위다. 쉽게 말해 농촌에서 양반이 물질적 생활을 구가하는 방법이란 뜻이 되겠다. 양반이 시골에서 자족적 생활을 할 경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윤리적인 문제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직 생활에서 물질적 삶의 방법을 물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새' 책이 과연 정말 얼마나 될까? 석가와 공자와 예수와 마호메트의 어록과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플라톤의 저작이 출현하고, "도덕경"과 "장자"가 죽간에 쓰인 이후 과연 '새' 책이 있을 것인가. 근대에 와서는 마르크스의 "자본"과 다윈의 "종의 기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뒤 과연 누가 '새' 책을 쓸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책은 불행하게도 이들 책의 각주에 불과한 것이다.
-홍석주 가문의 책읽기
그가 대과를 통해 적극 벼슬하려 하지 않은 데에는 어머니 영수합 서씨의 강력한 권유가 있었다고 하는데 뭐 이런 내용이었다. "문벌이 더할 수 없이 혁혁한 집안에다가 네 형 홍석주가 저토록 출세를 했는데, 동생인 너까지 출세를 하게 되면 세상의 질투의 대상이 될 터이고, 이로 인래 가문이 위태로울 것이다. 말아라. 그만 두어라" 이 전설이 사실인지, 어머니의 말을 따랐는지 알 길이 없지만, 홍길주 자신 스스로 과거를 포기했던 것은 틀림없다.
흔히 임금의 사위가 되면 좋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특히 재능이 뛰어난 젊은이일수록 부마가 되면 인생 그날로 끝이다. 부마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고, 따라서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 관료가 되는 것이 최고의 이상이었던 사회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벼슬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저주에 가깝다. 해서, 빼어난 가문의 똑똑한 젊은이일수록 부마가 되는 것을 꺼린다. 물론 그 이하의 인간이라면 좋아하겠지만.
천재 세종의 경우를 보라. 그는 소현왕후심씨에게서 8명의 아들을, 영빈 강씨를 위시한 5명의 후궁에게서 또 10명의 아들을 얻었다. 딸은 공주와 옹주 합쳐 4명을 두었다. 엄청난 숫자 아닌가. 하지만 정조는 아들이라고는 순조 한 사람, 딸은 숙선옹주 한 사람뿐이었다. 이런 딸이었으니 얼마나 이뻤으랴. 한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옹주님이 하문下門이 막힌 고녀였다는 것이 아닌가. 즉 남자와 잠자리가 불가능한 여성이었던 것이다. 가련한 딸에게 더 애정이 가는 법. 정조는 사위만은 최고의 남자를 구해주리라 결심했다. 인물과 문장, 가문 등등을 고려한 결과 홍현주가 '찍혔다.' 왕의 사위, 곧 부마가 되면 출세는 그날로 끝임을 아는 홍현주는 속에 불길이 일어았으나, 왕명을 어찌할 것인가.
모기령에 앞서 염약거란 사람이 있었다. 염약거는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이란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치밀한 문헌적 증거를 들어 "서경"에 실린 글의 반이 가짜라는 것을 논증했다. 그런데 옛날 주자 역시 "서경"의 절반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주자 학설이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모기령이 나서서 책을 한 권 썼는데, 제목이 '고문 상서의 억울한 하소연' 쯤으로 번역되는 "고문상서원사古文尙書寃詞"다. 이 책 역시 조선의 지식인들을 열광케 하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람들이 고문상서가 진짜냐 가짜냐 언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약용 역시 이 작업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해남海南 유배지에서 쓴 책이 바로 "매씨서평"이다. 그 원고가 홍석주 집안에 전해졌다. 홍석주가 읽어보니 중요한 책이 빠졌다. 그래서 정약용에게 "고문상서소증"을 빌려준다. 훑어보니 "매씨서평"에서 그가 했던 작업은 이미 "고문상서소증"에 다 있는 것이 아닌가. 정약용은 절망했다. 하지만 어떤 장약용인가. 다시 "고문상서소증"을 이잡듯 검토하고 오류를 찾아내어 자신의 저작에 수렴하였다. 홍씨 집안은 정보에 빨랐던 것이고, 다산은 늦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홍씨 집안의 거대한 최신의 장서가 정약용 학문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나는 홍석주에게서 진정한 인문학자, 진정한 독서가의 모습을 본다. 서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아니하는 칸막이 속에 앉아 바늘 끝 같은 분야를 공부하노라면서, 우리는 그것을 '전공'이란 거룩한 명사로 부른다. 슬프다. 인문학이 원래 추구했던 삶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은 어디에 갔는가. 홍석주의 "독서록"을 보고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쇠퇴를 한탄하기 전에, 정말이지 '인문학'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유만주 - 한 젊은 지식인의 광적인 독서 체험
유만주兪晩柱는 널리 알려진 사람이 아니다.
교과서는 인간의 지식을 제한하는 감옥이다.
유만주의 아버지는 저암著菴 유한준兪漢雋(1732-1811)이다. 유한준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만주의 일기 "흠영欽英" 1775(영조 51)-1785(정조 9)
유만주는 10년 동안 정조가 각별히 문제 삼았던 명·청의 문집과 소설, 잡서를 읽고 있다.
유만주의 일생 소업은 오직 책읽기로 그는 독서에 미친 사람이었다. "을유년(1765년, 유만주 11세)부터 1780년까지 읽은 책이 아직 1천권이 안되니 박식하지 못한 것이 마땅하다"고 스스로 탄식.
"문장의 아름다운 곳은 고인과 같지 않은 데 있다. 만약 고인과 같은 글이라면 지어서 무엇하랴?"(원굉도)
"전겸익錢謙益의 문장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잃게 하여 돌아갈 줄을 모르게 만들고, 잠시라도 좌우에서 떼놓지 못하게 할 정도"
"서상기西廂記"에 대한 기록은 1775년 1월22일의 "혹자는 서상기 1부는 '거울 속의 꽃이요, 물 속의 달이며, 눈 밭에 남은 기러기 발톱의 흔적과 같은 문장'이라고 한다"는 기록에서 시작된다.
그가 가장 열렬히 탐독한 것은 김성탄이 비평한 "수호지"다.
그는 "수호지"가 엮어내는 총체성에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등장인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분과 성격이 온갖 색을 갖추어 나타나니 재주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수호전의 비평은 지극히 신묘하다. 무릇 문자를 험난하게 쓴 것을 성탄이 이에 용이하게 펼쳐주어 그것을 읽어보면 문장가의 활법을 깨달을 수 있다"
소설의 수사학적 우월성을 밝힘.
유만주의 경우에서 보듯, 18세기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의 사유를 지배했던 것은 베이징에서 흘러 들어온 서적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요즘 젊은 축들은 우리나라 선배의 문장을 보지 않고 중국 책에 빠져 있다"는 말은 액면 그대로 사실이다. 중국에서 수입된 지식을 제외하고서는 조선 후기의 문학을 읽어내기란 불가능하다.
19년 전 처음 "흠영"을 보았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 인간의 독서 편력이 놀랍기도 했거니와, 이 일기로 인해 조선 후기 지식인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지식의 범위와 사유의 방식을 다시 검토해야할 필요를 깊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신채호의 영어책과 고서古書
한학과 영문학에 정통했던 변영만卞榮晩(1889-1954)은 어느 날 단재가 영어책을 읽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neighbour'를 단재는 '네이그후바우어'라고 읽지 않는가. 변영만은 놀라 단재에게 "단어 안에 묵음이 있으니, '네이버'라고만 발음하시오"하였다. 그런데 단재의 말이 더 엉뚱하다. "나도 그거야 모르겠소. 그러나 그건 영국인의 법이겠지요. 내가 그것을 꼭 지킬 필요가 무엇이란 말이요" 아, 이 자신감! 요즘 어디서 이런 대담한 인간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신채호는 칼라일Thomas Carlyle의 "영웅숭배론",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로마쇠망사"까지 거침없이 읽었다 하니, 그 독해력의 수준이 예사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