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혁과 이현상
차일혁(車一赫, 1920년 ~ 1958년 8월 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경찰관이다.
그는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항일전을 위해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 활동을 펼쳤다.[1]
해방 후 귀국하여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의 인민군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되어 빨치산 토벌대 대장으로 복무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빨치산 소탕을 담당하는 전투경찰대 제2연대연대장으로 근무하며 조선 공산당 총사령관인 이현상 등을 토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다.
70명의 결사대원으로 2천여 명의 적을 격파하였고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도 사살하였다. 그러나, 차일혁은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동족상잔이었다고..”라는 글을 전북일보에 기고하였다. 그는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을 화장하여 하동 송림에 뿌리며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이로 인해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아서 부대원들에게 태극무공훈장이 3개나 수여되었지만 자신은 받지 못하였다.
1951년 5월, 전라북도에 새로 주둔한 국군 8 사단(당시 사단장 최영희 준장)과 군경합동 회의 참석차 차일혁은 도계로 갔다. 회의에는 지리산 전투경찰대 사령관 신상묵을 비롯한 경찰 지휘관들과 최영희 사단장 및 8사단 참모들이 참석했다. 회의 후 따로 모인 전투경찰대 지휘관들은 화엄사 소각 명령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이 명령은 숲이 우거질 시기인 녹음기에 빨치산들이 근거지가 될만한 사찰 및 암자를 소각하라는 것이었다. 화엄사 소재 지역은 8사단 방득윤 대대장이 관할하고 있었고, 명령도 방득윤 대대장에게 내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방득윤 대대장은 명령 수행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고, 이를 알게 된 차일혁 18대대장은 방득윤 대대장에게 해결책을 제안했다. 화엄사 대웅전 등의 문짝을 떼어내어 문짝만 소각하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명령을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으로 이해했고, 문짝만 뜯어내어 소각해도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방득윤 대대장도 이에 동의했고, 이로써 화엄사는 전체 사찰이 소각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 유명한 사찰 등 문화재들에 대한 폭격도 될 수 있는 대로 피했다. 결국 그는 잇따른 명령 불이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1954년 충주경찰서 서장으로 발령을 받은 그는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하여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불우청소년들에게 학업기회를 제공하였다.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펼쳤던 독립운동단체로, 지리산 인근에서 빨치산 토벌시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온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진해경찰서장으로 재직시 좌익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차일혁 경무관은 이후 공주경찰서장으로 좌천된 후, 1958년 금강의 곰나루에서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38세의 나이에 타계하였다. 자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1958년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으로부터 감사장을 수여받았다. 1998년 화엄사는 화엄사 경내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1990년 그의 아들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를 출간하였다.
2008년 문화재청에서는 빨치산의 근거지인 화엄사 등의 사찰을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절하여 명찰들을 보존한 공적이 있는 차일혁 경무관에게 감사장을 추서하였다. 경찰청에서는 2011년 8월 차일혁 총경을 경무관으로 승진 추서하였다.
2013년 국가보훈처에서는 올해 ‘이달의 6․25전쟁영웅’ 12명 선정되어 국가보훈처 달력으로 공식 지정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C%B0%A8%EC%9D%BC%ED%98%81
차일혁 경무관
6·25전쟁 때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은 1953년 9월 하동 쌍계사 근처 빗점골 전투에서 사살됐다.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돼 서울로 옮겨져 창경원에 전시됐다가 20일 만에 다시 하동으로 내려갔다. 빨치산 대장의 시신을 거둬주려는 사람은 일가친척 중에도 없었다.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준 이는 그를 사살한 지리산토벌대 2연대장 차일혁 총경이었다. 차일혁은 이현상을 화장한 뒤 뼈를 자기 철모에 넣고 M1 소총으로 빻아 섬진강에 뿌렸다.
▶차일혁(1920~1958)은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에서 늘 뛰어난 전과(戰果)를 올려 '지리산 호랑이'라고 불렸다. 칠보발전소 탈환작전에선 75명의 병력으로 2000명의 적을 무찔렀다. 그는 용맹과 지략만 뛰어났던 게 아니었다. 그는 1951년 6월 11일자 전북일보에 "공비 토벌 중 소 두 마리를 노획했으니 주인은 찾아가시오"라는 광고를 실었다. 토벌대원의 주린 배를 채우는 것도 급했지만 목숨 같은 소를 잃은 농민 심정을 먼저 헤아렸다.
▶같은 해 남부군 근거지인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차일혁은 고민했다. '절을 불태우는 건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고 유지하는 데는 천 년 세월도 부족하지 않은가.' 그는 지금 국보 67호로 남아 있는 각황전의 문짝을 뜯어내 불태우고는 "전각 문짝을 태운 것도 절을 태운 것이니 명령을 따른 것"이라며 돌아갔다.
▶한때 차일혁의 토벌대는 부대원 33명 중에 순수 전투경찰관은 한 명뿐이고 나머지는 귀순한 빨치산 포로들로 채워진 적이 있었다. 당시 군과 경찰 일각에선 이런 그를 '온정주의자'라고 헐뜯기도 했다. 차일혁은 공주경찰서장 시절 가족과 함께 금강으로 물놀이 갔다가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때까지도 그의 계급은 총경이었다.
▶경찰청이 고(故) 차일혁 총경에게 53년 만에 경무관을 추서하겠다고 밝혔다. 6·25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하거나 위험한 직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경찰관 709명도 한 계급씩 특진시키기로 했다. 이미 지하에서 진토(塵土)가 되었을 이분들이야 이제 와 한 계급 올라간들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겠는가. 어려운 때 자기가 사는 공동체를 위해 살다 간 분들의 꽃 같은 이름을 기억하고 명예롭게 하는 것은 남은 이들을 위해 더 필요한 일일 것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17/2011061702027.html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며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 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
그들은 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음에서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고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
이 시를 읽으면 언제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5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우리 사회는 우파, 좌파의 이념 대립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서로 총칼로 죽이고 죽는 전쟁 중에 빨갱이라면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광분하던 시절에 전쟁의 원인을 정확히 보고 전쟁의 부질없음을 적고 있다. 그 분의 인간적 양심과 용기와 혜안(慧眼)에 존경을 표하고 싶다. 더구나 이 시를 지은 분이 빨치산의 신화적 존재인 '이현상'을 사살한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다니 더욱 놀랍다.
한국전쟁 당시 정부는 지리산에서 활약하는 빨치산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화엄사를 소각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차일혁 대장은 국보인 화엄사 각황전의 문짝 하나만 떼내어 불태우고는 상부에 화엄사를 소각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때 차일혁 대장이 아무런 역사 의식 없이 명령대로 화엄사를 불태웠다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화엄사에는 차일혁 대장의 공덕비가 세워져 역사의 교훈을 알려주고 있다.
1953년 9월 17일 차일혁 부대는 지리산 빗점골에서 이현상을 사살하였다. 사살된 이현상의 시신은 경찰 간부들의 과잉 충성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서울로 운송되어 왔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죽은 시신은 보기 싫다고 거절하여 창경원에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그 후 이현상의 시신은 화개장으로 돌아왔는데 친척들도 역적이라며 인수를 거부하였다. 차일혁 대장은 빨치산 토벌을 함께 한 전투경찰대 5연대장 정인주 총경과 상의하여 이현상의 시체를 정중히 화장하기로 결정하였다. 비록 공비의 괴수로서 국가를 혼란하게 하였지만 그래도 서로가 한판 겨루었던 상대로서 정중히 장례를 치루어 주는 것이 적장(敵將)에 대한 예우라 생각했던 것이다.
1953년 10월 8일 차일혁 대장은 2연대 본부 옆에 있는 섬진강 백사장에서 이현상의 시체를 화장하였다. 그의 유품인 염주도 함께 화장했다. 지리산 칠불암이 소각되고 주지가 피살되어 갈 곳이 없어 차일혁 부대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스님에게 독경을 부탁하였다. 화장이 끝난 후 차일혁 대장은 이현상의 뼈를 자신의 철모에 넣고 M1 소총으로 빻아 섬진강 물에 뿌렸다. 그리고 차일혁 대장은 권총을 꺼내 허공을 향해 3발을 쏘았다.
그것은 이현상이 가는 길에 부치는 차일혁의 조사(弔辭)였으며, 지리산에서 숨져간 수 많은 원혼들에게, 초라한 모습으로 삶을 끝낸 이현상에게 보내는 조사였다. 그리고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없기를 기원하는 그의 외침이기도 하였다.
차일혁 대장은 이현상을 정중히 화장하였다는 이유로 상부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리산에서 차일혁 대장과 함께 빨리산을 토벌하고, 이현상을 정중히 화장해 준 5연대장 정인주 총경은 전쟁이 끝난 후 속세의 인연을 끊고 불교에 귀의하여 스님이 되었다.
차일혁 대장은 일선 경찰서로 복귀하여 공주경찰서장 재직시절, 1958년 8월 9일 금강에서 수영하던 중 그의 아들 차길진이 보는 앞에서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나오지 않았다.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 두 사람 모두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다.
차일혁 대장은 중국 황포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중국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일본군 요인암살 등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해방 후 귀국하여 당시 미 군정의 보호아래 있던 종로경찰서의 악명 높은 삼륜(三輪)경부와 헌병사령관을 저격하였다.
이현상은 일제시대 때부터 노동운동, 독립운동으로 1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나라를 찾겠다는 신념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나라가 독립되어서는 서로 총을 들고 싸우게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총을 들고 서로 싸우면서도 사로잡은 상대방의 포로들은 최대한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다고 한다.
http://blog.daum.net/mahatma-jhk/30228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