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미국의 돈을 빨아 들이는 탁월한 흥정꾼
이승만은 이런 일에 노련한 대가였고, 미국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무상 원조를 받아내어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이런 돈이 한국의 총수입 가운데 6분의 5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것도 '합법적'이거나 기록된 총액만 그렇다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 치하에서는 1952년 텅스텐 수출사건(중석불 사건) 1954년의 면화 수입사건이건 혹은 유사한 숱한 사기사건이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부정부패 사건들이 줄지어 일어났다. 이승만과 그의 아내가 착복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음이 분명했지만, 이들은 내각의 관료, 정치적 우군, 가까운 친구를 부자로 만들어 주는 배려를 효과적으로 했던 것이다. 실로 1950년대의 거의 모든 주요 사업 계획은 이승만의 집무실을 거쳐 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정은이 지적한 것처럼 이승만의 광기에는 나름의 책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가 자유주의와 자유시장을 미덕으로 여기는 미국인들한테 얼마나 모욕적이었을까! 이승만은 "동양의 흥정꾼", "회피의 명수"였다고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1953-1959 미 국무장관)는 품평했으며,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협박'에 대해 불평했다. 리처드 닉슨은 그를 도박꾼 아니면 공산주의이거나 혹은 양자를 겸한 사람이라고 부른 적이 있으며 엄포와 극단 정책의 면에서 공화당원들한테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의지할 데는 자기밖에 없음을 알고는, 냉전으로 인해 주어진 대한민국의 엄청난 지정학적인 영향력과 판돈 모두를 싹슬이하려는 강인한 포커꾼으로서의 타고난 기술을 이용하여 "전 세계의 패자로부터 최대의 '자릿세'를 뽑아냈다. 코미디언인 리처드 프라이어Richard Pryor처럼 이승만은 현세에서 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즉 자기 호주머니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우연하게 미국 납세자의 돈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조금도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이것이 비합리성이었을까 아니면 우정은의 말대로 "광기 속의 책략"이었을까? 그런 상상할 수도 없는 현금이 유입되는 마당에, 이승만이 아이젠하워한테 돈을 빼내는 여러 방법을 궁리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을 무엇 때문에 했겠는가?
공식적인 출처를 보면 1945-65년 사이에 미국 국고의 약 120억 달러가 한국에 갔다고 되어 있다. 최고조에 달한 때는 1957년이었으니, 그때 한국의 국내 세입이 4억 5,600만 달러인데 경제 원조로 미국으로부터 끌어들인 돈은 3억 8,300만 달러였다. 여기에 군사 원조도 4억 달러가 추가된 데다가 주한 미군 경이로 또 3억 달러가 추가되었다. 한국에 대한 군사 원조 액수는 유럽 전체에 대한 군사 원조 액수보다 상당히 높고,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 대한 군사 원조 액수의 4배이다.
뉴욕주 연방 준비이사회 소속의 경제학자인 아서 블룸필드Arthur Bloomfield는 이승만에게 "명실상부한 중앙은행"을 창출하고 은행대출의 책임을 "그것을 마땅히 관장해야 하는 국회한테" 맡기라고 권고하였다. 블룸필드는 이를 '민영화'라고 불렀지만 그런 권고가 받아들여졌다 해도 이승만의 표준적인 국정 운영 절차에 한 단계를 덧붙이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승만은 이제 국회 금융위원회 위원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지시를 해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이승만이 블룸필드의 권고에 아랑곳하지 않았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었다.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햔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