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퍼다 버리다

수능 끝난 다음날
학교 운동장에 커다란 트럭이 왔다
3학년 교실은 쓰레기장이다
아이들은 책을 질질 끌고 나온다
두엄더미 거름 삽으로 퍼내듯이
뒷간 그득 찬 똥장군으로 퍼내듯이
아이들은 책을 푹푹 상자째 퍼다 버린다
일 년 아니 삼 년 내내 생을 걸고
풀고 또 풀던 교과서 문제집들
끼고 다니고 베고 자며 눈물 콧물 묻어 있는
책들을 하루아침에 미련 없이 던져버린다
그동안 금과옥조 성전처럼 받들었으나
저 책들은 사실 시시한 군소리였다
산더미 같은 책더미 트럭은 금방 넘친다
내 한숨과 꿈이 서린 소중한 책들
까맣게 밑줄 긋고 베껴 쓰며 청춘을 바쳤던
가보처럼 물려주고 싶은 책에 대한 얘기는
까마득한 신화 또는 썰렁한 개그다
시험 끝나면 책은 보물은커녕 오물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으냐고?
공자님은 모른다
배우고 매일 문제 풀면 정말 신물이 난다는 걸
강 건넌 뒤 저리도 미련 없이 뗏목을 던져버리니
장자가 보면 좋아하시겠다
그런데 웬 뗏목이 저토록 많단 말인가
저 뗏목들을 밤낮으로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니
아이들이 왝왝 토해내고 싶기도 하겠다
갈수록 숲이 성글고 공기 가빠지는 이유도
수능 끝난 다음날 고3교실에 와보면 알 것이다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조향미,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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