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들은 모두 항상 옳고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 입에서 냄새가 나고 항상 너무 바싹 다가온다. 물론 어떤 아이도 감히 선생님에게 비누와 칫솔 같은 것이 매일 사용하라고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못하고, 선생님이 가까이 오면 차라리 숨을 멈추거나 고개를 돌린다. 교사들의 옷차림만 해도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은행원과 기타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의자 판매원조차도 제대로 양복을 차려입고 정중하게 고객을 맞이하는 시대에, 교사들은 집에서 입던 옷차림 그대로 학교 안을 돌아다니기 일쑤다. 무릎이 튀어나온 코르덴바지와 다리지 않은 셔츠, 하도 입어 늘어난 스웨터, 누런 발톱이 길게 자라 있고 파란 혈관이 솟은 발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샌들의 퍼레이드를 여전히 맞닥뜨리게 된다.
 여기 학교에서는 교사들에게 절대 질문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경험이 가르쳐준다. 질문을 해봤자 교사들을 화나게 할 뿐이고, 어차피 직접적인 대답은 절대 못 듣는다. 또한 우수생은 교사가 우수하다는 증거이다. 반면 열등생은 학생 자신의 능력 부족 탓이다. 아니면 그 부모가 가정교육에 형편없이 실패했기 때문이거나. 다른 모든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어떤 고객을 유치하려고 하는 동안 그 고객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학교는 다르다.
 수많은 아이들이 정규시간 외의 보충수업을 받거나 사설 보습학원에서 개인별 맞춤 교육을 받고 있다. 대체 이런 초현대적인 아웃소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는 사실 원래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고용된 교사들이 이 정도의 기분 좋은 교육 열정을 보여주기를 기꺼운 마음으로 기대했었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아이들의 의구심도 그만큼 점점 커진다. 점차 학교가 스트레스로밖에는 느껴지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철학자 슬로터다이크가 "학습은 자기 자신에 대한 즐거운 기대이다."라고 멋지게 표현했던 일체의 학습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학교 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학생의 탓일 뿐, 절대 불합리하고 무미건조하고 무능력하고 유치하고 게으른 교사들의 탓이 아니다.

 학부모는 학교의 막일꾼, 보조교사, 노예다.

*아이와 매일 맞춤법 카드를 체크하세요.
*아이가 구구단의 9단을 매우 어려워하니 연습시키세요.

 학부모는 그 교사가 아이에게 적합한지 묻기보다는 오히려 아이를 학교에 적응시키기 위해 비싼 상담치료를 예약한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수업이 휴강되는 것을 기뻐해도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살하는 학생의 수가 훨씬 늘어날 테니까.
 부모들은 무능한 교사들마저 가지고 있는 압도적 권력과 한없는 냉소주의를 몸소 경험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에게 가르치는 재능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말만 하면 수면제라 할 정도로 무미건조하고 추상적으로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교사는 학생을 욕하고 부모를 탓하거나 모든 것을 타락한 교육정책과 위협적인 자금 부족, 교육 행정당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바보 같은 명령 탓으로 돌리기 전에, 제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이런 점을 물어보아야 한다.
 요즘 학교 다니기를 좋아하는 학생이 어디 있는가? 주위에 아는 학생들에게 한번 물어보라. 그들은 학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를 견뎌낸다. 참아낸다.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버틴다.
 예전에 오스트리아 작가인 넷트로이가 "페니키아인들은 돈을 발명했다."라고 말하고는 이렇게 불평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조금 발명했는가?" 지금의 학교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왜 우리에겐 훌륭한 교사가 이렇게 조금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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