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은 국민의 가슴에 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놓은, 창군(創軍) 이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그보다 약 7개월 전인 1979년 10월에 발생한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진압군이던 해병대가 보인 태도는 그와는 딴판이었다. 부산과 마산에 투입된 해병대원들은 철저하게 비폭력 노선을 지켰다.

  그간 해병대의 부마항쟁 시위진압 실태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뒷날 광주의 비극을 일으킨 공수부대는 부마항쟁 때도 투입됐는데, 그때도 시위진압 방식에서 해병대와 달리 폭력적인 양태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왜 그토록 달랐던 걸까.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박희도 준장이 지휘하던 1공수여단과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박구일 대령이 지휘하는 해병대 1사단 7연대를 투입한다. 마산에는 20일 정오를 기해 위수령을 선포한다.

 이후 시청과 역 등 주요시설을 장악한 1여단과 3여단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시위대를 진압한다. 특히 이들 공수부대 장병들은 이후에도 총기에 착검을 하고 트럭을 이용해 부산대와 동아대를 하루 종일 오가며 학생들과 시민들을 위협한다. 단순히 심리전 차원만은 아니었다는 게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송기석(56)씨는 “얼굴에 시커멓게 위장 크림을 바른 공수부대원들이 참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로 시민들을 구타했다. 20, 30대 청년들은 길을 걷다가 그들과 마주치면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맞아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실제로 당시 31세이던 전병진씨는 서면 한독병원 앞을 지나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공수부대 장교가 휘두른 M16 소총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뇌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은 당시 지역 언론사에도 제보됐지만, 계엄령하에서 철저히 덮여 있다가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진상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처럼 공수부대의 활동상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려진 반면 해병대가 어떻게 시위진압을 했는지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해병대 1사단 7연대가 부산대학교를 주둔지로 삼았다는 사실만이 공개됐을 뿐이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병대의 진압과정은 충정훈련으로 단련되고 최루탄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와는 매우 달랐다.

 당시 군 작전상황에 대한 기록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기록물 존안(存案) 당시인 1980년 ‘향후 30년 동안의 기밀’로 분류돼 2010년에 빛을 볼 예정으로 육군 문서보관소에서 먼지만 들이켜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학술과장인 이동일씨는 “광주 민주화운동과 달리 부마항쟁에 대한 군 관련 기록은 전혀 공개된 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한 해병대 관계자들과 현장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3공수여단의 대규모 병력과 달리 해병대는 7연대 73대대라는 소규모 병력이 계엄 1진으로 투입돼 시위진압에 나섰다. 7연대 71대대와 72대대는 10월26일 수영비행장 투입 직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맞아 지역 관공서와 부산대로 이동했다.

 해병대는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는 달리 시위진압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던진 벽돌과 돌멩이에 맞아 피를 흘려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으로만 시위대를 밀어냈다. 제일 앞줄은 간부와 병장이, 두 번째 선은 상병이, 그 뒤로 일병, 이병이 서서 총기 멜빵끈으로 서로 팔을 동여맨 채 시위대에 대응했다. 앞줄이 돌에 맞아 쓰러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섰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등병은 앞에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소대장으로 현장에 투입됐다는 김동일(53)씨는 “전경은 말할 것도 없고 육군도 시위진압훈련을 해왔지만, 우리 해병대는 한 번도 진압훈련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런(몸으로 때우는) 방식이 최선이었다”면서 “총기를 뺏기지 않기 위해 멜빵끈을 최대한 늘려 옆 동료와 팔을 동여매고 무조건 전진만 했다”고 회고했다.

 학생시위대의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해병대원들이 계속 전진하자 나중엔 주변의 시민들이 나서서 시위대를 말리기까지 했다. 당시 박구일(뒷날 해병대사령관 역임) 7연대장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구일 연대장이 장병들에게 직접 정신교육을 했던 내용은 해병대 예비역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박구일씨는 후에 14대 국회에 진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거쳐 1992년 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박 전 의원은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도 당시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거부했다.

 대학생으로 시위대에 참여했다는 김현숙(48)씨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맞기만 하는 해병대와는 재미가 없어 시위를 포기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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