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나이에 학생들은 변덕스런 교사들의 손에 맡겨진다. 교사들 사이에서 정의감은 찾아볼 수가 없고, 그들은 예측불허의 권력을 자랑한다. 수업에서는 교사가 선호하는 것들이 다뤄진다. 때로는 자제력을 상실하거나 아예 무관심한 표정을 짓는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물을 흐리는 거라고? 절반 또는 3분의 2가 아니고? 그들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은 대부분 해고 불가능한 공무원 신분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거나 해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만큼 좋은 것을 모두 수용하는 능력이 큰 인간 부류는 없다. 아이들의 마음은 어떤 씨앗이나 다 금방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라나는 진정한 처녀지다. 그 마음을 눌러 넣는 어떤 틀에도 기꺼이 맞춰지는 밀랍이다.
-크리스티안 고트힐프 잘츠만, <개미의 책>에서

 교 사들이 점점 나빠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나아질 것이다. 한번 아이와 함께 시베리아 툰드라의 식물대를 논하고 if절의 올바른 사용법을 둘러싼 의문점을 둘러싼 문제점을 풀고 현미경의 발명에 대해 조사해 봤던 사람은 가르치는 일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안다. 명료하고 흥미진진한 설명,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는 지속적인 동기 부여, 강력한 보상, 그리고 감정을 배제하고 그 시간에만 국한한 처벌이 바로 그것이다.
 식탁에서 가르치는 교수법 백병전에서 우리가 알아낸 결론이란 이런 것이다. 수업 참여는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이 고통을 줘서는 안 된다. 접근방법이 올바르면 공부는 아주 큰 즐거움이 된다.
 어 쩌면 나는 너무 부족하거나 너무 지나치게 하는 게 아니라, 잘못 지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격려와 지도, 지원이 적당한지를 내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는가? 과도한 요구와 부족한 요구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실력을 향상시키는 칵테일을 어떻게 섞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아낼 수가 있겠는가?
 자연 상태에서 관찰 가능한 거미와 딱정벌레, 기타 동물들에 대해 배우면서 고작 비디오 시청으로 그치는 생물 시간이 나를 격분시킨다. 그것도 6주 내내 비디오만 볼 때 더더욱.
 아이가 시험을 망치거나 시를 못 외우거나 숙제를 잊어버리면 대개 나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 아마 나는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고.
 아이의 사려 싶은 질문, 재미있는 농담, 끝없는 호기심, 그리고 지칠 줄 모르고 캐묻고 생각하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줄어들고 없어진다는 점. 그 점이 나를 화나게 한다.
 수 업과 교육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성(性)에 개인적인 관계는 그늘을 드리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와 부모가 맡는 상이한 역할은 상호보완적이다. 학교 수업과 가정교육은 관계에 부담만 주는 대신에 관계를 보완해줄 수 있다. 그 열쇠는 객관화다. 교사는 미묘한 문제들에서 부모보다 객관적일 수 있고, 취향이 아니라 객관적 관점에 따라 학습을 정리할 수 있다. 학습에서 좋은 부모보다 좋은 교사의 역할이 더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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