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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죽어도 사상의 강제를 당하고 싶지 않다. 타협도 아니요 내 한 몸의 편리를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될 수록 참을 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참은 스스로 하는 것이요 참 그것을 위해 하는 것이다. 참은 완전한 마음의 자유에서만 될 수 있다.

 현실만을 보는 사람은 현실의 인간만을 보기 때문에 산다면 이 육체가 사는 것이요, 죽는다면 이 육체적인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뿐인데, 종교적인 인생관에서 보면 사람은 육신도 있으나 또 그것과는 별개로 정신이 있다. 그러므로 육신에도 살고 죽고가 있지만 정신적으로도 살고 죽고가 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뜻에서 “자기를 죽여라”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은 육체와는 아무 관계없이 할 수 있는 말인데 그것을 모르는 현실주의자가 들으면 그것은 곧 자살을 하라는 의미로 들린다. 그러면 오해가 일어난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은 이런 관계로 된 것이었다. 그가 “나는 왕이다” 하였다. 그것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자기가 진리의 왕이란 말이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혹은 알면서도 일부러 가져다 붙이기만 하면 그것은 마치 정치적인 혁명을 하려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므로 그를 미워하는 반대자들은 이것을 악용하여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빌라도 앞에 가서 “이놈이 스스로 왕이라 하여 카이자를 반대하고 난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고 몰아서 죽였다. 오늘날에 와서 법치 국가의 자랑의 하나인 종교의 자유란 이 관계를 잘 구별하여 현실 사회를 다스리는 법률로써 양심의 세계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때면 묘하게 이것을 이용하여 애매하게 양심의 소유자를 해하는 일이 많다.

 다스리는 자는 다스림 받는 자보다 도량이 넓고 커야 할 것이다. 비난한다고 곧 성을 내는 것은 어른의 마음이 아니다. 힘껏 하노라 해도 잘못이 있는 것이 인간이요, 또 까놓고 말이지 사실 우리 정치에 잘못된 점이 많지 않은가? 그러면 비판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잘못이 있다 한다고 나무라는 것은 나라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다.

 오리 새끼와 닭의 새끼를 한 데 몰아 한 우리에 넣어도 통일은 아니다. 우리에서 나오는 날 오리 새끼는 물로, 닭의 새끼는 뜰로 갈 것이다. 무기로 잡는 것은 물질이지 인격이 아니다. 사람은 그 양심을 때려서만 사로잡을 수 있다. 이북을 도로 다 찾아도 사람은 다 죽이고 찾으면 무엇하나? 그 사람 건지자고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것인데, 뿔을 고치다가 소를 죽임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을 살리고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내 형제를 도로 찾는 것은 그의 양심을 찌르는 외엔 수가 없다. 무엇으로 양심을 찌를까? 몸은 칼로 찔러 잡을 수 있지만 양심은 나의 희생 밖에 다른 것으로는 할 수 없다.


-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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