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4)

from 역사이야기/정리 2008. 6. 24. 09:59

물에서는 이순신, 뭍에서는 곽재우
-수군과 의병의 활약

  6월 고니시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가토군은 함경도로, 구로다군은 황해도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후부터 본격적인 명의 원군 파견이 이루어진 12월까지 무려 6개월에 걸친 기간동안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군의 전략은 육군이 북상하는 가운데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 물자를 약탈하면서 전진하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왜군의 전략이 조선 수군에 의해 좌절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각각 좌.우수영의 2개의 수군부대가 있었다. 그러나 왜란 발발 직후 경상수영의 원균과 박홍 함대는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따라서 전쟁 전부터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착실하게 힘을 비축해왔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좌수영 함대가 조선 수군의 주력이 되었다.

 왜군이 상륙한지 한 달여 만인 5월 초에 이순신 함대는 최초로 출동하였다.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왜선 37척을 파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조선 수군측의 피해가 경상자 1명에 불과했다는 경이적 승리의 기록이었다.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옥포 승전 직후 조정에 올린 ‘옥포파왜병장(옥포에서 왜병을 격파한 장계)'에서 이순신은 임진왜란 최초의 감격적인 승리를 전하고 있다. 옥포 해전의 승리는 조선 군사들에게 왜군과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6월초 이순신 함대의 2차 출동부터는 전라우수사 이억기 함대와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가 가담하였다. 사천 해전에서 돌격선인 거북선이 처음으로 등장하였고 연이은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파괴하는 또 한 번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왜군의 승보에 제동이 걸렸다. 대노한 도요토미는 서해안을 돌파하라는 지상명령을 내리게 되고 일본은 본국에 남아있던 왜선을 총동원하여 견내량에 결집시켰다. 이에 7월초 이순신 함대는 3차 출동을 하여 견내량에 정박 중인 일본의 대선단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선보인 학익진(학의 날개 모양의 전선 포진법)은 화력으로 결판을 내는 이순신 해전법의 백미였다. 이 한산도 대첩에서 조선 수군은 층각선(일본군 지휘관이 타는 높은 배)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8월초에는 안골포에 정박중인 선단을 공격하여 왜선 100척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왜군의 서해 진입을 완전히 차단하였다. 8월 말 이순신 함대는 4차 출동을 감행하여 왜선 470여 척이 정박하고 있는 일본 수군의 본거지 부산포 내항으로 쳐들어갔다. 이후 왜군이 해전을 기피하고 수군을 육군으로 전환시키는 기현상이 벌어졌으니 땅에서의 연패와 물에서의 연승이 명암처럼 엇갈리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수군이 연승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순신의 탁월한 지휘역량과 전략전술, 전선의 견고성, 화력의 우세함에서 찾을 수 있다.


 육지에서는 관군이 연패하고 있었다. 관군이 패주하는 반면, 육상 전투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의병의 활약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의 후방을 흔들었다. 곽재우, 고경명, 조헌,  이정암 등의 맹활약으로 왜군의 육상작전도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다.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경남 의령지방의 곽재우였다. 백마를 탄 붉은 옷의 의병장으로 유명한 그는 정암진을 근거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육지에서의 승리가 대부분 수성전(守城戰:이정암의 연안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 권율의 행주대첩)인데 반하여 곽재우는 전략요충지를 설정한 뒤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물에서는 이순신, 땅에서는 곽재우라는 말을 낳을 정도로 그의 전술은 탁월했다. 그는 조총을 겁내지 않았다. 조총의 사정거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에 의해 전라도 상륙이 좌절된 왜군은 함안, 의령 등을 지나 전라도로 들어가기 위해 정암진 도하작전을 기도하였으나 곽재우 의병이 이들을 대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곽재우는 강 가운데 장애물을 설치하여 왜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기습하는 뛰어난 전술을 구사하였다.

 곽재우 의병의 활약은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과 함께 육로를 통하여 전라도로 들어가려던 왜군의 작전을 수포로 만들어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만일 왜군이 전라도를 장악했더라면 이순신의 수군도 보급이 끊기고 무기의 제조가 불가능하게 되어 바다에 고립되지 않았을까? 따라서 곽재우 의병의 활약은 수군의 승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황해도 연안의 이정암은 연안성을 중심으로 수성전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의병의 숫자는 500여 명, 왜군의 숫자는 무려 6,000여 명이었다. 이정암은 연안성을 공격해온 구로다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연안성을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안대첩은 조선 정부가 위치하고 있었던 의주와의 연락로 확보에 기여하였으며, 소수의 병력으로 왜군의 대적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이후의 전세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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