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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죠지

 183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5개월 다닌 것 까지가 그의 학력의 전부. 16세 때부터 동인도회사 선박에서 선원 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인쇄소에 취직. 결혼해서 자녀를 두었으나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1860년대 후반, 뉴욕에 갔다온 후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됨.

 "뉴욕의 부는 대단했고 안락함은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부는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으며 안락함은 확산되지 않았다. 한편에는 거짓말같은 부가 있었으나 다른 한편에는 상상할 수 없는 빈곤이 있었다. 부유한자, 가난한 자 모두 빈곤에 대해 끔찍스러운 공포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공포심은 빈곤 그 자체보다 더 악성이었다."

 죠지는 샌프란시스코 타임즈에서 인쇄공으로 일하던 중 문장력을 인정받아 신문 기사를 쓰게 됨. 후일 그가 명성을 얻게된 토지문제에 대한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함.



 1879년 [진보와 빈곤] 집필, 발간.

 1866년 노동단체의 후보로서 뉴욕 시장에 출마. 애브럼 휴위트, 테어도어 루즈벨트에 이어 3위로 낙선. 1897년 재차 뉴욕 시장에 도전했으나 또 낙선.

 1897년 선거 유세중 사회자가 죠지를 "노동자의 위대한 친구"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본인은 노동자의 특별한 친구라고 자처한 적이 없습니다. 노동자에게 특권을 달라는 요구는 하지 맙시다. 노동자는 특권이 필요없습니다. 본인은 노동자 계층을 위해 특별한 권리나 특별한 이해를 옹호하거나 요구한 일이 없습니다. 본인은 모든 사람의 평등한 권리를 대변할 뿐입니다."




19세기의 화두를 꺼내는 까닭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각종 통계와 지표를 제시하며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이제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조차 그들이 느끼는 상대적 빈곤감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상대적 빈곤감, 상대적 박탈감의 정체가 무엇일까? 그런 느낌에 대해 짚어나가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것들이 우리를 함께, 그리고 평화롭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이 양극화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나는 19세기에 쓰여진 헨리 죠지의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 이 더러운 하수구로부터 전세계를 비옥하게 만드는 인간의 땀의 강물이 흘러나오며 순수한 황금도 흘러나온다. 인간이 가장 애써 이룩한 이 문명이 그 기적을 이루는 바로 이곳에서 인간은 야만인으로 되어 버렸다."[알렉시스 드 토크빌]

 확실히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생산력은 인류에게 빈곤과 야만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을 가져다 주었다. 인간 생활이 더 편리하고, 더 안전하며 풍요롭게 될 가능성이 활짝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었을 뿐이었다. 현실은 어떠했는가?[산업혁명의 빛과 그늘, zeno12  (2003-09-08 01:31)]

 헨리 죠지의 [진보와 빈곤](1879)은 ‘맨체스터의 노동자 거주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공장 폐수로 오염된 시커먼 강물’로 연상되는 시대, 최저 12시간에서 14시간 심지어 16시간에 이르는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과 극도의 저임금으로 노동자는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던 절대적 빈곤이 지배하던 시대의 담론이다.

 그러나 내가 이 낡은 19세기의 화두를 꺼내는 까닭은 진보의 이면에 빈곤이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갈수록 그 격차가 벌어지는 이유에 대한 성찰이다. 헨리 죠지가 분석했던 도구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아담 스미스, 리카르도, 맬더스를 딛고 비밀스럽게 한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헨리 죠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진보와 빈곤의 퍼즐

  사막의 목마른 카라반이 바로 눈 앞에 살랑거리는 수풀과 반짝이는 샘물을 언덕 위에서 볼 때처럼 심장의 고동이 뛰고 신경이 전율했을 것이다. 우리는 물질의 풍요가 그 당연한 귀결로 도덕수준을 높이고 인류가 꿈꾸어 온 황금시대를 이룰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악이나 죄나 무지나 잔인함이(이런 것은 빈곤에서 또는 빈곤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데) 빈곤이 사라진 세상에 어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나 현실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문명세계의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불황, 비자발적 실업, 기업인의 자금부족, 노동자 계층의 빈곤과 불안이다. 독재국가에 불황이 있는가 하면 민주국가에도 불황이 있다.

  이 모든 현상의 밑바닥에는 어떤 공통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불황이라고 묶어서 이야기하는 한 부류의 현상은 물질적 진보에 수반하며, 물질적 진보가 진전될수록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의 강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불황에 어떤 공통의 원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원인은 물질적 진보 그 자체이거나 또는 그에 밀접히 연관된 그 무엇이라고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물질적 진보가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똑같이 풍요로움을 주지 못한다는 진보와 빈곤의 퍼즐에 대한 해답이 물질적 진보와 연관된 그 무엇일 것이다. 그 러나 빈곤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본의 증가가 필요하다든지 노동자의 수를 제한해야 한다든지 작업능률을 높여야 한다든지 하는 처방은 폐기되어야만 한다. 개별 노동자가 진실로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임금의 원천이 되는 기금(자본)을 창출한다면 노동자가 증가한다고 해서 임금이 줄어들 이유가 없다. 노동자의 수가 많아질수록 노동의 능률성이 분명히 증가하므로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임금은 노동자의 수와 더불어 오히려 증가해야 한다.

  그런데 이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전제에 이의를 제기한 하나의 경제학적 이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구증가에 의해 자연의 이용이 늘어나면 자연의 생산력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는  맬더스의 "인구론"이다.


부유층에게 면죄부를 주는 맬더스의 이론

  맬더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 영국의 경제학자)는 진보의 이면에 빈곤이 존재하는 이유를 인구가 생존물자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데서 찾았다. 맬더스는 생존물자의 산술급수적 증가가 기하급수적인 인구의 자연증가를 초과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소박한 논리는 인류의 미래에 충격적인 결과를 예고했다. 2세기가 지나면 인구:생존물자의 비는 256:9가 되고 3세기가 지나면 4096:13이 되며 그 이후에는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다.

  그러나 생존물자의 한도를 넘는규모의 인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실제로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맬더스의 결론은 인구의 무한증가 경향은 인간의 출산력에 대한 도덕적 절제 또는 사망률을 높이는 여러 요인에 의해 억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결국 세상은 악하고 비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구가 증가하면 생존물자를 잘게 나누어야 하므로 빈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리카르도는 맬더스의 이론을 지원하는 원리를 하나 더 추가시켰다. 그것은 인구가 증가하면 종전보다 생산성이 낮은 토지를 추가로 사용하게 되므로 지대가 상승한다는 원리이다.

  그러나 맬더스의 이론이 성공한 큰 이유는 그것이 기존의 이익을 위협하거나 강자의 이익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재산의 힘을 휘두르면서 세상을 지배하는 계층을 위로하고 안심시켜 준다는 데 있다. 일부의 사람이 세상의 좋은 것을 독점할 수 있는 특권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맬더스의 이론은 이 특권을 구조해주러 나온 것같이 보인다. 궁핍과 빈곤의 원인이 정치제도에 있다고 하면 그러한 제도를 취하는 어느 정부도 존속할 수 없을텐데 맬더스의 이론은 궁핍과 빈곤을 자연적인 원인에 돌리고 있다.

  맬더스의 이론이 나온 시기는 프랑스 혁명에 의해 기존의 사회체제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기성 권력층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맬더스의 이론이 특히 고마운 것이 되었다.


자연의 인색함인가, 인간의 탐욕인가?

  동인도회사의 목사였던 위리엄 테넌트(Rev. William Tennant)는 자신의 쓴 "인도의 재창조" 제1권 제39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힌두교 지역의 토지가 대단히 비옥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기근이 자주 생기는 현상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기근은 토양이나 기후의 불리함에 기인하는 것이 분명히 아니다. 이 악은 정치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으며 조금만 유의해서 보면 정부의 탐욕과 수탈이 그 원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어차피 농사를 지어봤자 빼앗기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근면이나 저축에 대한 자극을 받지 못했고 겨우 먹고 살 만큼만 농사를 지었다. 따라서 흉년이 들면 곧 기근이 발생한다."

  가장 열등한 인간들이 무절제한 탐욕으로 전국을 지배하고 있으며 빈곤에 찌든 백성에게 재산이란 재산은 무엇이든 포기하도록 폭력으로 강요하는 곳에선 한때 인구가 많던 지역도 사막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감자를 주식으로 삼게 된 것은 영국 경제학자들의 냉혹한 표현대로 "아일랜드 사람들의 무분별" 때문이 아니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다른 식품이 있는데도 감자를 주식으로 삼을 까닭이 없다. 그들이 감자를 주식으로 한 이유는 감자 이외의 것은 엄청난 소작료로 모두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과거나 현재나 빈곤의 진정한 원인은 인간의 탐욕이지 자연의 인색함이 아니다.

  연어 한 쌍이 수년 동안  천적으로부터 잘 보호된다면 바다가 연어로 가득찰 것이라든지, 토끼 한 쌍이 이와 비슷하게 보호된다면 곧 대륙을 뒤덮을 것이라든지 하는 동식물계의 재생산력의 예는 인류도 생존물자를 압박하는 경향을 갖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비유로 계속해서 인용된다.


 이러한 비유가 옳은가?

  그러나 사람은 다른 생물과 달라서 인구가 증가하면 식품도 증가한다. 사람 대신 곰이 유럽에서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했다고 해도 현재의 곰의 숫자는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인구는 증가해왔으나 일인당 식품의 양은 과거보다 훨씬 늘어났다. 이로써 식품의 증가가 인구증가의 원인이 아니며 반대로 인구의 증가가 식품증가의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즉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에 식품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에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있다. 매나 사람이나 닭을 먹기는 일반이다. 그러나 매가 많으면 닭이 줄어들지만 사람이 많으면 닭이 늘어난다.

  인구는 생존물자의 한계를 압박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 맬더스의 추론은 근거없는 가정(이를 논리적인 용어로는 "매개념 부당주연의 오류"라고 한다.)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의 가정은 마치 아기가 태어나서 몇달 동안 성장하는 것을 보고 그 비율로 아기가 성장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처럼 근거가 없으며 괴상하기조차 하다. 아기가 출생시에 10파운드이고 8개월이 지나 20파운드가 되는 것을 보고 아기가 열 살이 되면 몸무게가 황소와 같고 열 두 살이 되면 코끼리만 해지고 서른 살에는 체중이 175,716,339,548톤이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문명 수준이 일정할 때 인구가 많아지면 인구가 적을 때보다 물자가 더 풍부하게 된다. 빈곤과 비참의 원인은 실로 자연의 인색이 아니라 사회의 부정의에 있다. 인구증가로 생겨나는 새로운 입은 과거에 있었던 입보다 더 많은 식품을 소비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손은 현재의 자연질서 속에서 더 많은 물자를 생산해낸다.

  부유한 나라는 자연이 풍족한 나라가 아니라 노동이 능률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가난한 나라에서도 그 생산력은, 고용이 충분히 이루어질 경우 최하층민에게 생존물자만이 아니라 사치품까지도 공급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다. 생산력이 풍부하고 부의 생산이 최대가 되는 사회에서 빈곤이 발생한다니! 이것이야말로 문명세계를 당황케하는 수수께끼이다.


빈곤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빈곤의 원인은 무엇인가?

  문명은 번성하더라도 그후 반드시 쇠퇴하고 만다. 그 이유는 사회가 발전하면 불평등이 제도화되는 경향이 있고 인구의 집적에 따라 생기는 권력과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되면서 이것이 결국 개선과 사회발전의 원동력을 억제하고 끝내는 쇠퇴하고 만다는 데 있다.

  부의 집중이 계속 확대되는 원인은 토지의 사적 소유(및 기타의 독점)에 있으며 토지의 사적 소유는 불로소득을 발생시켜 지속적인 진보에 필요한 평등과 자유를 파괴한다. 이에 대한 해결은 토지 및 천연자원에서 생기는 불로소득을 환수하여 공공의 이익을 위해 쓰는 것이다.

  자유시장사회에서의 경제적 댓가는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자신의 생산적 노력을 통해 사회에 공급하는 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토지는 생산에 어떤 기여를 했든지 간에 그것이 토지소유자의 노력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토지는 자본의 한 형태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이 점은 토지가 미래의 예상수익을 자본화한 가격, 즉 지가를 댓가로 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매된다고 하더라도 변함이 없다.

  땅과 공기와 물은 모든 이에게 주어진 천부의 자원이다. 그러나 공기와 물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반면 발 밑의 토지는 이미 누군가의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고 대다수 사람들이 이 땅에 대해 가진 권리는 단지 길거리의 보도블럭을 밟고 다닐 정도의 권리밖에 없다.

  토지 때문에 한을 품고 죽은 농민들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많았던가?  현대의 도시 빈민들의 고통은 또 어떠하겠는가? 토지는 신(神)적 소유물이요, 만인의 것이다. 그것이 계속해서 가진 자들의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쓰이는 한, 진보의 이면에 드리운 빈곤의 그늘을 걷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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