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치호랑이 교육과정”은 Harold Benjamin이 J. Abner Peddiwell이라는 가명을 써서 출판, 미국의 교육을 신랄하게 풍자한 책이다.
‘검치호랑이’는 고양이과에 속하는 화석(化石)동물로 현재는 멸종된 동물이다. 몸 크기는 대체로 현재의 사자와 비슷했고, 위턱에 있는 17∼20㎝ 정도의 송곳니(검치)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의 저자인 Benjamin의 상상력은 선사시대를 무대로 펼쳐진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검치호랑이를 쫓는 방법을 터득하고 그 기술을 후손에게 가르치기 위해 최초의 교육과정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자연환경의 변화로 검치호랑이가 사라지고 새롭게 곰이 등장하게 되면서 혼란이 시작된다.
쓸모없게 되버린 구 교육과정을 놓고 선사인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된다. 그리고 과연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Benjamin은 그 이야기를 오늘날의 ‘교육과정’에 대한 논쟁에 빗대어 우화적으로 쓰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교육이 미래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전해주지 못한다면, 그런 교육은 기만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육과정의 수립과 변경을 둘러싼 현상과 담론들의 철학적 배경에 대해 쉽게 풀이하고 있다. 이를테면 보수적 교육과정과 진보적 교육과정의 충돌, 도구과목과 이해과목, 기초과목과 응용과목 간의 비중과 격차, 교육과정의 비대화 현상 등등... 그러한 것들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리고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것이 무엇인가를 적시하고 있다.

※ 내용요약

“검치호랑이(saber-toothed tiger) 교육과정”

 최초의 교육학 이론가이자 실천가는 셀레엔기(Chellean times:구석기 시대에 속하는 한 시기로 돌도끼가 주로 사용되었음)에 살았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부족에게 알려진 이전의 다른 어떤 도구보다도 더 예리하고 쓸모 있는 도구를 만듦으로써, 그 지역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선구자적인 그에게 ‘새 주먹’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실천가이자 사색가인 ‘새 주먹’은 어느 날 놀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하나의 영감을 받게 되었다. “아이들은 즐거움을 위해 놀고, 어른들은 안전과 풍요로움을 위해 일을 한다. 뼈와 막대기, 그리고 조약돌을 가지고 노는 이 아이들이 의식주와 안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도록 가르친다면, 우리 부족이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는데 도움이 될 텐데...” 이러한 생각은 ‘교육목표’가 되었고, 그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교육과정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우리 부족민들이 배불리 먹고 몸을 따뜻하게 하며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 끝에 ‘새 주먹’은 이 첫 번째 교육과정의 첫 번째 과목을 ‘맨 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기술’로 정하였다. 다음으로 털이 길고 작은 말을 잡을 때 주로 몽둥이를 사용하였으므로(왜냐하면 그 말이 동작이 느리기 때문에) ‘털이 긴 작은 말을 몽둥이로 잡는 것’을 두 번째 과목으로 정하였다. 마지막으로 그의 부족민들이 사나운 검치호랑이를 퇴치하는 수단으로 불을 사용하는데 착안, ‘불로 검치호랑이를 몰아내는 것’을 세 번째 과목으로 정하였다.
 이 교육과정은 성공적이었다. 아이들은 이 세 과목의 실습을 통하여 단지 유희적인 놀이에서 벗어나 효과적인 유목 활동을 배우게 되고,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넉넉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갔다.

 ‘새 주먹’의 부족민들은 이 훌륭한 교육제도로 영원히 잘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때 안전하고 행복했던 동굴 왕국에서의 생활은 불안전하고 혼란스러워졌다. 그 부족이 거주하는 계곡의 바로 위쪽까지 빙하가 다가와 녹아내리기 시작하면서, 오랜 세월을 거친 빙산이 모아온 흙과 자갈이 개울물 속에 섞여들었다. 한때 수정같이 맑아서 바닥까지 볼 수 있었던 개울은 탁한 물로 변했다. 따라서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털이 긴 작은 말들은 늪지를 떠나 건조하고 너른 평원을 향해 멀리 떠나가고 그 자리는 자그마한 얼음조각과 함께 내려온 영양들이 차지했다. 영양들은 매우 온순하고 민첩했으며, 위험에 대비한 예리한 후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영양들 가까이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때문에 말을 몽둥이로 때려잡는 기술도 쓸모가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대기 속에 습기가 많아져 검치호랑이들이 폐렴에 걸려 대부분 죽어갔다. 따라서 불로 검치호랑이를 쫓는 기술도 쓸모가 없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검치호랑이가 사라진 후 보다 더 사나운 빙하의 곰들이 나타났다. 곰들은 불을 무서워하지 않아 불로 검치호랑이를 쫓는 기술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부족민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배운 모든 기술들을 절망 속에서 포기해야만 했다. 음식으로 이용할 물고기나 고기가 없었으며, 옷으로 쓸 짐승 가죽도 없었고, 밤낮으로 오솔길을 다니는 털투성이의 저승사자(곰)에 대한 대책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부족 중에는 옛날 ‘새 주먹’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오랜 생각 끝에 덩굴을 엮어 조잡하나마 후릿그물을 만들어 흙탕물 속에서 고기를 잡기 시작하였다. 이 방법은 부족민들 전체가 옛날의 방법, 즉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고기를 혼자서 잡아들였다. 또 다른 사람은 탄력 있는 나무 덩굴로 올가미를 만들어 영양들이 다니는 길목에 덫을 놓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옛날에 12명이 1주일 동안 몽둥이로 말을 잡았던 것보다 더 많은 고기와 가죽을 하룻밤에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곰이 지나간 자리에 깊은 구덩이를 파서, 그 위를 나뭇가지로 덮어 함정을 만든 후 곰이 떨어져 갇히면 돌멩이로 때려잡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리하여 그 부족민들은 예전보다 더욱 안전해졌으며, 사로잡은 곰들로 고기와 가죽을 비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새로운 방법들에 대한 지식이 보급되면서 모든 부족민들은 새로운 생활방식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물고기 그물을 만들고 영양 덫을 설치하고, 곰을 잡기 위한 함정을 파느라고 더욱 열심히 일을 하였다.

 일을 하면서 몇몇 사려 깊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는 학교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물 짜기와 사용법, 덫 설치하기, 함정파기와 같은 새로운 활동들은 현대생활에 필수불가결한데, 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러자 무사안일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순수한 질문에 즉각 반박하였다.

 “학교?”
 “자네들은 지금 학교에서 배우고 있지도 않잖은가? 자네들은 지금 여기 진흙 속에서 일하고 있잖은가? 자네들이 하고 있는 일이 학교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러자 학교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들이 대꾸했다.

 “학교는 지금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못하고 있소.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고, 몽둥이로 말을 때려잡으며, 호랑이를 몰아내는 수업이 무슨 소용이 있소? 그물의 사용, 영양 덫 설치하기, 곰 잡기를 왜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부족민들, 특히 학교를 관리하는 지혜로운 원로들은 이 제안에 대해 관대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했다.

 “그렇게 해서는 교육이 되질 않네.”
 “그것은 단순한 훈련이기 때문이야. 물고기 잡기, 몽둥이로 말 때려잡기, 호랑이 몰아내기 등 기본적인 과목들로 학교 교육과정은 지금 양이 너무 많네. 우리는 그물 짜기, 영양 덫 설치하기, 곰 죽이기 등과 같이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이런 것들을 교육과정에 추가할 수가 없네. 구석기시대 초기의 교육제도를 창시한 우리의 위대한 ‘새 주먹’께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시면 지하에서 벌떡 일어날 걸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젊은이들에게 기본원리에 대해 보다 철저한 기초지식을 제공하는 것이네. 그러다 보니 요즘 중등학교 졸업생들까지도 심지어 교사들조차도 직접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다던가, 몽둥이를 쓰는 방법이 서투른데 그 이유는 우리가 기본원리 교육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지.”

 “하지만, 제기랄.”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말을 이었다.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그런 쓸모없는 활동에 흥미를 갖겠습니까? 더 이상 쓸모가 없는데 말을 몽둥이로 때려잡는 방법을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지혜로운 원로들은 매우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게. 우리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네. 우리는 단순한 훈련으로 발전시킬 수 없는 일반화된 민첩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가르치네. 우리는 말을 잡기 위해 몽둥이로 말을 때려잡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네. 우리는 영양 덫을 설치하는 것처럼 평범하면서도 전문화된 작업으로는 얻을 수 없는 학습자의 일반화된 힘을 개발하기 위해, 몽둥이로 말을 때려잡는 방법을 가르치네. 우리는 호랑이를 몰아내기 위해 호랑이 몰아내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네. 우리는 생활의 모든 일과 관련되면서도, 곰 잡기와 같은 일로는 기를 수 없는 고상한 용기를 줄 목적으로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라네.”

  교육과정의 개편을 요구했던 대다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진보적이었던 한 사람이 마지막 항변을 하였다.

  “하지만 어쨌든 시대가 변했다는 점을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최신식의 활동을 시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마 이런 새 방법들이 상당한 교육적 가치를 가질 것입니다.”

  그러자 마침내 지혜로운 원로들이 분개했다. 그들의 친절한 미소는 사그러들었다.

  “ 자네가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진정한 교육의 본질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 것이네. 교육이란 거센 물살 속에서도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 바위와 같이,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도 버티어 내는 그 무엇이네. 교육이란 어떤 영원한 진리이며, '검치호랑이 교육과정'은 그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네!!!”

  새로운 그물 고기잡이 시대가 발달한 후에, 전통적인 학교에 대한 불만이 일어났다. 그리고 곧 이런 불만은 교사들을 향하게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교사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을 정도로 예의가 있었다. 어쨌든 그 시대 이후 교사의 지위와 준비과정이 어느 정도는 표준화되기 시작하였다.
  족 장들은 부족민의 평화, 번영, 안전,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규칙을 세우곤 하였는데, 그들은 교사들에게 자격을 나타내는 뼈(영양의 넓적다리 뼈)를 항상 휴대토록 하였다. 거기에는 교육학과 한 과목 또는 그 밖의 표준 교양과목에서 그들이 받은 ‘물고기 식사’(학점을 의미함)를 표시했다. 태고적부터 물고기는 식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한 물고기 식사에서 다음 물고기 식사 사이의 간격이 자연스럽게 교육을 이수했음을 측정하는 적절한 단위로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물고기 잡기 과목은 15‘물고기 식사’, 말 때려잡기 과목은 15‘물고기 식사’, 호랑이 몰아내기 과목은 12‘물고기 식사’ 등과 같이 초등, 중등 과정마다 이수해야 될 ‘물고기 식사’가 정해졌다.

  대학 강좌 초기에 교육학 교수들은 가르칠 주제가 매우 적었다. 그들은 학급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실질적인 힌트를 제공하고, 어떤 상황에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는 주먹구구식의 방법을 몇 가지 설정해주며, 그들이 알고 있는 훌륭한 교사와 그렇지 못한 교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교육학 교수들의 조잡하고 유치한 일은 교과 전공자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생산적인 학문이나 체계적인 사고를 통해, 호랑이 수염에 사용할 타오르는 횃불의 신비한 요소나, 손을 빠져 나가려는 고기를 잡기 위한 엄지의 조작과 위치변화와 같은 문제에 일생을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학생들에게 교수방법만을 보여주려는 거짓된 학자들을 경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교육학에 대한 학문적인 경멸은 교육학 교수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자신의 낮은 문화적 지위(?)에 자극받은 그들은 그들의 학문을 수준 있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첫번째로, 그들은 구석기 시대 대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학부 성원들에게 요구했던 전문화, 그리고 그 이상의 전문화를 요구함으로써 그들의 과목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였다.
  두번째로, 그들은 교육과 관계된 모든 것을 양적으로 세고 측정함으로써, 자기 집단의 모든 성원이 교육에 대해 과학적으로 연구하기를 요구하였다. 바로 이 부분이 교육학 교수들이 가장 위대한 용기와 창의력을 보여준 부분이었다. 미지의 작용과 미지의 속도로 서로를 계속 수정해 가는 미지의 수많은 요소들이 관련되는 학습상황을 측정하는 과제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교수들은 그 일에 착수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끝으로, 교육학 교수들은 그들의 과목을 배우기 어렵게 함으로써, 학문적으로 존경받는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연구하였다. 이것 역시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학문적인 동료들이 했던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그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그들은 그들의 과목을 논리적으로 조직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이 교수기법에 대한 일상적인 용어에 친숙해져 새로운 생각에 대해 무디어질 때까지, 그들은 교육학 과목의 실제적인 모든 교과를 미루고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과정을 먼저 제시하였고, 그들의 강의가 이해하기 어려워지도록 전문용어를 개발하였다.
  그리하여 교육학 과목은 존경받게 되었다. 그 과목은 다른 어떤 영역과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다양한 전문가가 생겼다. 그러나 이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교육학 교수들이 교수법을 가르친 학생들 중 대부분은 그 기법을 실습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 상황에 반발하는 옛날의 ‘새 주먹’과 같은 몇 명의 사려 깊은 부모가 있었다.

  “그러나 여보세요, 우리는 우리의 과목을 학문적으로 존경받게 하는데 성공하지 않았습니까?”라고 교육학 교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물론 그렇죠.”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부모들은 시인을 했다.
  “그러나 당신들은 학교를 위해 더 나은 교사를 양성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어요. 사실, 우리는 갈수록 여러 측면에서 교육이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육학 교수들은 이런 비난으로 괴로워했고,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 교육의 목적에 대해 심사숙고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현 교육방법의 주요한 오류는 학습목표가 너무 많다는 데서 기인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들이 모든 목적과 행동을 스스로 추진하도록 두시오. 교사의 간섭이나 통제없이, 아이들이 항상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결정하고, 자기가 목적했던 것을 계획하고, 자기가 계획했던 것을 실행하며, 자신이 한 것의 가치를 판단하게 두시오.”라고 그들은 교사들에게 권고했다.

  그러자 교사들은 불안해졌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개입해야 합니까?”라고 그들은 물었다.

  “교사들은 매우 중요한 안내자입니다. 교사는 아이들이 옳은 활동을 현명하게 선택하는 방향으로 이끌 것이고, 아이들이 착수한 활동에 보다 지적이고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을 제시할 것입니다.”

  교사 한 사람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음... 우리가 여전히 물고기 잡기를 가르치게 될 것임은 분명하군.”

  “그래.”
  다른 사람이 동의했다.

  그래서 학생들은 여러 세대 동안 물고기 잡기를 가르쳤던 학교의 따뜻한 물탱크를 타고 내려가서, 기초과정에서 이미 배운 동작을 처음부터 해보기 시작했다. 교사는 물탱크 가에 서서 학습자들을 안내하였다. 아이들은 즐겁게 웃고 물을 튀기었으며, 새로운 진보정신을 잘 알아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학생들 중 하나가 학교를 빼먹었다.

  “뭘 했니?”
  “놀았어요.”
  “어디서?”
  “개울 아래 쪽요.”
  “뭘 하고 놀았지?” 교사가 다그치듯 물었다.
  “저... 물고기 잡기를 했어요.”
  “뭐?”
  “허. 기가 차는군! 세상에 누가 이런 소리를 들어 봤을까?  너는 회초리를 맞아야 해. 개울이라고! 그래! 맞는 너보다 내 마음이 더 아프다. 그래도 맛 좀 봐라. 맛 좀 봐!”

  아이는 훌쩍이며 말했다.
  “정말 제가 아는 한, 개울은 물고기가 있는 유일한 장소예요!”

 물론 학생들은 물고기를 잡지는 못했으나, 전통적인 교육에서도 물고기를 잡은 적이 없었기에 그 후로도 그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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