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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저자 로테 퀸은 독일 사람으로 저널리스트이자 네 아이들의 엄마이다.

 “발칙하고 통쾌한 교사 비판서”는 학부모로서 그녀가 네 아이들을 키우며 직접 경험한 학교 교사들의 무능력, 나태안일, 냉소주의, 무관심을 질타하며 그들에게 내민 경고장이다.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독일의 학교와 교사들의 모습은 우리나라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많은 학부모들은 10년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듯한 통쾌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 책은 학부모보다 교사들이 먼저 읽어야 할 책이다.

 그러나 몇 군데에서는 교사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교사 집단이 가진 문제점으로 특화되어 서술되고 있다. 네 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쁜 교사들’을 만나 어려움을 겪은 저자는 ‘교사로서의 결함’을 넘어 ‘자연인으로서의 결함’까지 교사의 자질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쁜 교사’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대칭점에 있는 ‘좋은 교사’의 모델 제시는 교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저술의 취지를 더욱 충족시켜줄 수 있다. 책의 말미에 짧게 제시한 ‘좋은 교사’의 한 가지 사례가 있기는 하나 그 내용과 의미가 충분치 않아 보인다. 저자의 아이들이 겪은 여러 교사들의 여러 가지 수업방식에 대한 저자의 이해와 평가도 대부분 부정적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은 교사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럼 우리더러 어떻게 가르치라는 말인가?”

 이 책에 나타나는 독일 학부모의 자세는 우리가 배워야할 점이다.

 독일의 학교, 교사, 교육청(상부기관)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학부모의 자세는 다른 것 같다. 이 책의 어디에도 “이래 가지고 우리 애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겠느냐?” 식의 표현은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에서도 “우리 애가 김나지움 학생이라면 적어도 do와 make의 용법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식의 표현, 말하자면 결과에 집착하기 보다는 과정에 충실하려는 학부모의 자세가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아, 우리에게 훌륭한 교육자를 주소서! 우리에게 아이들을 합리적으로 대하고 아이들의 사랑과 신뢰를 얻으며 능력을 일깨워주고 소질을 키워주고 가르침과 모범으로 그들의 재능과 소명에 따라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존재로 만드는 그런 소질과 능력, 수완을 갖춘 사람들을 주소서.
-크리스티안 고트힐프 잘츠만, <개미의 책>에서

 아이가 기초를 충분히 익혀, 6년간 학교를 다니고 나면 읽고 쓰는 능력을 100퍼센트 갖추고, 장래에 아이에게 무슨 일이 닥치든 지속될 문화기술의 기초도 세워야 한다. 학교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비인간(非人間)은 학교에서 젊은이에게 잊지 못할 형상으로 크게 다가온다. 비인간은 거의 무한한 권력을 갖는다. 교육 지식과 오랜 경험으로 무장한 채 학생들을 자신과 꼭 닮은 인간이 되게 교육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망명자와의 대화>에서

 그러나 전체 교육제도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아서 아이들은 그 안에서 사이비적인 교육 행위에 따라 획일화된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 입구 위에 쓰여 있던 글귀를 오늘날에는 모든 교문 위에서 읽을 수 있다.

 교사들은 모두 항상 옳고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 입에서 냄새가 나고 항상 너무 바싹 다가온다. 물론 어떤 아이도 감히 선생님에게 비누와 칫솔 같은 것이 매일 사용하라고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못하고, 선생님이 가까이 오면 차라리 숨을 멈추거나 고개를 돌린다. 교사들의 옷차림만 해도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은행원과 기타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의자 판매원조차도 제대로 양복을 차려입고 정중하게 고객을 맞이하는 시대에, 교사들은 집에서 입던 옷차림 그대로 학교 안을 돌아다니기 일쑤다. 무릎이 튀어나온 코르덴바지와 다리지 않은 셔츠, 하도 입어 늘어난 스웨터, 누런 발톱이 길게 자라 있고 파란 혈관이 솟은 발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샌들의 퍼레이드를 여전히 맞닥뜨리게 된다.

 여기 학교에서는 교사들에게 절대 질문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경험이 가르쳐준다. 질문을 해봤자 교사들을 화나게 할 뿐이고, 어차피 직접적인 대답은 절대 못 듣는다. 또한 우수생은 교사가 우수하다는 증거이다. 반면 열등생은 학생 자신의 능력 부족 탓이다. 아니면 그 부모가 가정교육에 형편없이 실패했기 때문이거나. 다른 모든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어떤 고객을 유치하려고 하는 동안 그 고객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학교는 다르다.

 수많은 아이들이 정규시간 외의 보충수업을 받거나 사설 보습학원에서 개인별 맞춤 교육을 받고 있다. 대체 이런 초현대적인 아웃소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는 사실 원래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고용된 교사들이 이 정도의 기분 좋은 교육 열정을 보여주기를 기꺼운 마음으로 기대했었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아이들의 의구심도 그만큼 점점 커진다. 점차 학교가 스트레스로밖에는 느껴지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철학자 슬로터다이크가 "학습은 자기 자신에 대한 즐거운 기대이다."라고 멋지게 표현했던 일체의 학습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학교 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학생의 탓일 뿐, 절대 불합리하고 무미건조하고 무능력하고 유치하고 게으른 교사들의 탓이 아니다.


 학부모는 학교의 막일꾼, 보조교사, 노예다.

*아이와 매일 맞춤법 카드를 체크하세요.

*아이가 구구단의 9단을 매우 어려워하니 연습시키세요.

 학부모는 그 교사가 아이에게 적합한지 묻기보다는 오히려 아이를 학교에 적응시키기 위해 비싼 상담치료를 예약한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수업이 휴강되는 것을 기뻐해도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살하는 학생의 수가 훨씬 늘어날 테니까.

 부모들은 무능한 교사들마저 가지고 있는 압도적 권력과 한없는 냉소주의를 몸소 경험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에게 가르치는 재능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말만 하면 수면제라 할 정도로 무미건조하고 추상적으로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교사는 학생을 욕하고 부모를 탓하거나 모든 것을 타락한 교육정책과 위협적인 자금 부족, 교육 행정당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바보 같은 명령 탓으로 돌리기 전에, 제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이런 점을 물어보아야 한다.

 요즘 학교 다니기를 좋아하는 학생이 어디 있는가? 주위에 아는 학생들에게 한번 물어보라. 그들은 학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를 견뎌낸다. 참아낸다.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버틴다.

 예전에 오스트리아 작가인 넷트로이가 "페니키아인들은 돈을 발명했다."라고 말하고는 이렇게 불평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조금 발명했는가?" 지금의 학교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왜 우리에겐 훌륭한 교사가 이렇게 조금밖에 없는가?"

 하필이면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나이에 학생들은 변덕스런 교사들의 손에 맡겨진다. 교사들 사이에서 정의감은 찾아볼 수가 없고, 그들은 예측불허의 권력을 자랑한다. 수업에서는 교사가 선호하는 것들이 다뤄진다. 때로는 자제력을 상실하거나 아예 무관심한 표정을 짓는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물을 흐리는 거라고? 절반 또는 3분의 2가 아니고? 그들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은 대부분 해고 불가능한 공무원 신분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거나 해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만큼 좋은 것을 모두 수용하는 능력이 큰 인간 부류는 없다. 아이들의 마음은 어떤 씨앗이나 다 금방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라나는 진정한 처녀지다. 그 마음을 눌러 넣는 어떤 틀에도 기꺼이 맞춰지는 밀랍이다.
-크리스티안 고트힐프 잘츠만, <개미의 책>에서

 교사들이 점점 나빠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나아질 것이다. 한번 아이와 함께 시베리아 툰드라의 식물대를 논하고 if절의 올바른 사용법을 둘러싼 의문점을 둘러싼 문제점을 풀고 현미경의 발명에 대해 조사해 봤던 사람은 가르치는 일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안다. 명료하고 흥미진진한 설명,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는 지속적인 동기 부여, 강력한 보상, 그리고 감정을 배제하고 그 시간에만 국한한 처벌이 바로 그것이다.

 식탁에서 가르치는 교수법 백병전에서 우리가 알아낸 결론이란 이런 것이다. 수업 참여는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이 고통을 줘서는 안 된다. 접근방법이 올바르면 공부는 아주 큰 즐거움이 된다.

 어쩌면 나는 너무 부족하거나 너무 지나치게 하는 게 아니라, 잘못 지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격려와 지도, 지원이 적당한지를 내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는가? 과도한 요구와 부족한 요구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실력을 향상시키는 칵테일을 어떻게 섞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아낼 수가 있겠는가?

 자연 상태에서 관찰 가능한 거미와 딱정벌레, 기타 동물들에 대해 배우면서 고작 비디오 시청으로 그치는 생물 시간이 나를 격분시킨다. 그것도 6주 내내 비디오만 볼 때 더더욱.

 아이가 시험을 망치거나 시를 못 외우거나 숙제를 잊어버리면 대개 나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 아마 나는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고.

 아이의 사려 싶은 질문, 재미있는 농담, 끝없는 호기심, 그리고 지칠 줄 모르고 캐묻고 생각하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줄어들고 없어진다는 점. 그 점이 나를 화나게 한다.

 수업과 교육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성(性)에 개인적인 관계는 그늘을 드리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와 부모가 맡는 상이한 역할은 상호보완적이다. 학교 수업과 가정교육은 관계에 부담만 주는 대신에 관계를 보완해줄 수 있다. 그 열쇠는 객관화다. 교사는 미묘한 문제들에서 부모보다 객관적일 수 있고, 취향이 아니라 객관적 관점에 따라 학습을 정리할 수 있다. 학습에서 좋은 부모보다 좋은 교사의 역할이 더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정은 병든 학교를 위한 비상용 발전기인가?

 친애하는 파올리네 부모님께.

 두번째 시험의 채점 결과 영어 과목에서 따님 파올리네의 지식이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부분을 매울 수 있게 부모님께 다음과 같은 조치를 권합니다.

 파올리네는 동사 'da' 및 'make'와 같이 쓰는 단어, 재귀동사의 용법을 복습해야 합니다. 학생용 문법책과 교과서용 워크북을 구입해서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철저히 복습하기를 권합니다. 자녀와 함께 공부하십시오.

 하지만 새 학년이 시작된 이래 이 영어교사는 대체 뭘 한 거지? 마음 같아서는 이런 답장을 쓰고 싶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몇번의 훈계, 많은 대화에도 불구하고 딸아이가 가족 간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집안일 분담에서 그 애는 일에 너무 소홀합니다. 젖은 양말을 어디 벗어놔야 하는지, 넘치는 쓰레기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다 먹은 요구르트 통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파올리네에게 상기시켜줘야 합니다. 이 기회를 빌려 선생님께 이런 일의 일부를 제 아이와 함께 영어 시간에 처리해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그 애가 깨끗이 방을 치우고 가장 가까운 가족을 대하는 매너도 좋아질 수 있도록 지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 참, 이 말도 잊으면 안 된다.

이 편지를 읽으셨다는 확인 서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교사라고 자칭하는 자들의 권위는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종종 해가 된다.
-키케로

 학교 여름 축제 때 그는 황송하게도 요하네스가 친구 펠릭스와 함께 차린 음료수 노점을 찾아갔다. 그는 쥬스를 사고는 잔돈 2,500원을 두 소년에게 그냥 주는 생색을 냈다. 아이들은 공손히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는 "너희들이 그 돈을 섹스에 쓰지만 않는다면야."라고 대꾸하고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리고 가버렸다. 두 아이는 할 말을 잃고 얼굴이 시뻘개졌다고 나에게 말했다.

 열두살짜리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해도 되는가? 아이들을 상대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해도 되는가?

 형편없는 교사가 형편없는 자동차 제조업자, 형편없는 수공업 마이스터 또는 형편없는 세일즈맨과 구별되는 차이점은 무엇보다 한 가지다. 경제계에서는 어디에서나 형편없는 기업들이 자신들의 무능력의 비용과 결과를 스스로 책임진다. 이것이 직접적으로 파산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반면에 우리는 형편없는 교사들을 퇴직 때까지 먹여 살리고 그들이 날마다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도록 내버려둔다.

 교사들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짜 의도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료 교사, 학생, 학부모들과의 진실한 접촉을 최소한으로 제한한다. 수업에 아주 늦게, 마지못해서, 게다가 준비 없이 들어오며, 7교시부터는 거드름을 피우다가 수업을 되도록 일찍 끝낸다. 그리고 도망치듯이 직장을 떠난다. 그러다가도 신문에 교사직이 보수가 좋은 일자리라는 기사가 실리면 큰 소리로 개탄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버릇없는 자식을 돌보는 이런 끔찍한 직업을 가질 사람이 자기들 말고는 거의 없을 거라고 한탄한다.

 실제로 얼마 전 한 독일어 여교사가 초등학교가 아니라 김나지움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고 학교장에게 말했다고 한다. 학교장은 말했다.

"더 이상 멍청한 아이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랍니다."

 교사들은 수업을 아무도 왈가왈부해서는 안 되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폐쇄적인 교실 문화가 이를 용이하게 만든다. 그러니 다들 각자 설렁설렁 일하고, 동료 교사에게 의견을 구해서 자신의 교육성과에 대해 일종의 피드백을 얻겠다는 생각을 하는 교사는 별로 없다. 특정 교사와 그 교사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전적으로 금기다. 만약 학생들이 어떤 교사와 다른 교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면 상황은 일순간 매우 곤란해진다.

 "그건 내 관할이 아니란다."

 "난 그 선생님의 일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 할 말이 없구나."

 "동료 선생님의 뒷덜미를 칠 수는 없어."

 "얘들아, 그 선생님 말씀은 너희 얘기하고 정반대인데."


 모두 상처 받은 교사의 영혼이 핑계로 사용하는 말이다.

 교사들은 가르치기보다는 테니스를 하고 스키를 타고 집에 다락방을 개축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학교 행정당국의 널널한 자리를 노리거나 아니면 완전히 개인적인 번아웃 신드롬이 나타나서 조기 퇴직을 할 수 있도록 약삭빠르게 노력한다. 어쩌다 의무 수업시간이 5분 더 늘어나거나 연로한 교사의 수업시간 감축조치와 크리스마스 보너스가 폐지되거나 법령에 의해 여름방학 마지막 주에 학교에 출근해야 할 경우에는 엄청나게 흥분한다. 학교라는 파산한 상점을 구제하기 위한 합리적인 긴급조치는 오로지 교사 이익단체의 반대로 실패하고 기약 없이 무기한 연기된다.

 정말로 더 이상 피할 수 없으면 교사들은 이따금 관대하게, 심할 때는 거만하게 학부모들과 10분씩 면담을 해준다.

 "당시에 나쁜 학교들에서 젊은 교사로서 쌓았던 나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동안 나쁜 교사들에게 학교를 떠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R. 포퍼

 교사들의 고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기민당과 기사당의 노회한 보수주의자들 또는 독일농민연맹조차 교사들보다는 훨씬 뛰어난 유연성과 개방성, 새로운 것에 대한 실험정신을 갖고 있다. 달리 어떤 직업에서 이미 누군가 지나가서 잘 다져진 길을 그토록 고집스럽고 나태하며 무지하게 계속 전진할 수 있을까? 어느 교사나 사상적인 편협함을 아무 반대 없이 고수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뛰어난 전문지식인 양 내세우곤 한다.

"투쟁하는 자는 패배할 수 있다. 하지만 투쟁하지 않는 자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기본적으로 모든 교육학이 결국 세대 간의 관계로 귀결된다."
-하르트무트 폰 헨티히

 또한 학교는 본래 아이들이 이 사회에서 버티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능력의 전달을 위해 만들어졌다. 아이들에게 오로지 친밀하게만 대하고 반쯤 어머니 같은 온정만을 퍼붓는 교사는 오늘날 점점 더 중요해지는 이런 지적 능력의 전수 과정을 억눌러버린다. 이런 과정이 정확히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것이 결핍되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인식할 수 있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군것질을 금지하고는 자신은 몰래 가방에 들어 있는 쵸코바를 먹는 교사는 학생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 모습을 이미 다 보고 그녀가 거의 매시간 습관적으로 통보하는 규칙들이 실상은 어떤 것인지 저마다 결론을 내린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 결론이란 바로 '약자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자는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듣고 와서 "아무개 선생님이 말씀하셨는데..."라며 꺼내는 이런 말들은 확실히 언제나 식탁에 헛소리만 옮겨다 놓는다. 교사가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웃기는 행동,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변명, 어리석은 발언들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가정의 식탁으로 날마다 정말 밀물처럼 밀려온다.

 내 아이들 가운데 최소한 한 명의 교사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기고 내가 그 진상을 알기 위해 당장 수화기를 들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일없이 지나가는 날은 거의 하루도 없다. 하지만 전화를 걸어봤자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선생님은 어차피 모든 것을 다 부인하고 아이의 과도한 상상력에 대해 몇 마디 익살스런 발언으로 나를 구슬릴 테니까. 아무튼 그들은 구슬리는 데는 세계 챔피언이다.

 그런 교사들은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한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기에 자신의 정치 투어에 아이들까지 끌어들이는 것일까? 나는 어른다운 교사를 소망한다. 어설픈 교수법 실험, 유아적인 애착, 덜 여문 종교적·정치적 태도에 편향됨 없이 말 그대로 '교사(敎師)'로서 자기 정체성을 획득한 교사를 원한다. 인격과 신념을 가지고 학생들을 대하며, 그럼으로써 신뢰와 확신을 줄 수 있는 교사를 원한다. 이런 토대 위에 서 있을 때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학생과 교사는 양쪽 다 스스로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사적인 수용과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것을 제외하고, 그런데 교사의 경우 적어도 교사가 되기로 스스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자발성을 찾아볼 수 있는 반면에 학생에겐 약간의 선택권조차 없다.

 대체 교사는 무슨 권리로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고 아이들에게는 반대하거나 자기 의견을 개진할 가능성을 주지 않는가?

 교사는 우선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신뢰부터 얻어야 한다.

 "내가 너처럼 생겼다면 차라리 슈퍼마켓 계산원 일이나 하겠다."

 김나지움의 한 교사가 시험에서 최하 점수를 맞고 울음을 터뜨린 여학생을 비웃었다.

 교사들은 종종 학생들을 무시하고 부당하게 대우하고 자신의 재능이 없다고 믿게 하고 외모와 성격과 출신 배경을 가지고 창피를 준다.

 학생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수많은 행동들이 과거의 회초리와 징계 조치들을 대체하고 있다. 허튼소리, 얕보는 제스처, 무시하는 시선과 바보 같은 농담은 과거 학생들을 길들이는 수단이었던 꿀밤 먹이기나 회초리질보다 고통이 덜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당하고 만성적으로 악의적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훨씬 더 큰 상처를 준다.

 이 경우 어떤 아이들은 내면으로 후퇴하고, 어떤 아이들은 공격성을 밖으로 분출한다.

 교사가 교실 문을 닫는 순간부터 그곳에는 교사와 학생들만 존재한다. 특별히 어떤 문제가 생길 때에나 학부모들의 개입이 허락된다. 그것도 주로 상급학교 진학이 문제가 될 때.

 교실 문을 닫고 나면 그때부터 교사는 왕이다. 하지만 신하들의 신의와 충성심을 구해야만 하는 불쌍한 왕이다. 게다가 대개는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압력을 행사하고 부정한 방법을 써서 변덕스럽게 다스린다. 사실 교사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는 의문을 여기서 입 밖에 내도 괜찮을 것이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올 수 있다면 과연 몇 명이나 내 앞에 앉아 있을까?"

 처음부터 교사를 적으로 간주하는 학생은 없다. 적이라는 인상은 하룻밤 사이에 생기는 게 아니라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발생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다른 서른 명의 아이들과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서 일주일의 대부분을 몇 녀 동안 같이 보낸다. 이런 온실에서는 적의 이미지가 절로 번성한다. 학생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교사의 갖가지 반응을 매일 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부모들도 우연히 그런 경험을 하면 학생들과 똑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무시, 망신 주기 또는 무관심과 억측, 비열한 암시가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에게 받는 고통  만큼 많은 고통을 교사들에게서 받는다는 증거는 많이 있다.

 "선생님들은 과잉반응을 해요. 이유를 대며 반박하면 야비하게 나오죠. 누가 이의를 제기하면 명예가 손상되었다고 느끼는지 말도 못하게 불쾌하게 굴어요."

 마치 농노제도처럼 만사가 오로지 교사들의 호의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못된 김나지움 교사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선택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오지 못하는 자는 김나지움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그들은 독선적으로 잘난 척한다.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자!'가 그들이 교실에서 벌이는 공중전의 바탕이 되는 비밀스런 신념이다. "설명하고 해석해!" "책을 펴고 세 번째 단락을 읽어!" "내가 방금 한 말을 되풀이해봐!" 등의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은 그들에게 자꾸 똑같은 질문만 하게 만드는 점점 굳어가는 머리를 불완전하게 감출 뿐이다.

 교사들이 많은 것이 변해야 하지만 자신만은 바꿀 게 없다고 확신할 때 대체 누가 그들에게 다르게 일하라고 가르치겠는가?

* 넌 멍청해서 1 더하기 1도 모르지?

* 바보 같은 소리 좀 작작해라.

* 주둥이 닥쳐. 나는 그러라고 돈 받는 거니까.

* 죽여주게 게으르지만 똑똑하긴 하구나.

* 난 거기 관심 없다. 방해하지 마라.

* 너희가 뭔가 먹을 걸 줘야만 조용해지지?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

* 나를 바보 취급하려는 거냐?

* 너희들이 할 수 있으면 해봐.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 한 대 얻어맞기 전에 조용히 해라.

* 너희 때문에 돌아버리겠다.

* 너희랑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

* 너희 때문에 기운이 다 빠진다.

* 하루 종일 너희랑 함께 있으면 어떤 놈도 못 견딜 거다.

* 자꾸 그러면 다음번에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거야.

* 돼지 같은 자식들!

* 내가 큰 소리를 질러도 너희는 절대 겁 안 먹지?

* 본때를 보여주마.

* 정말 죽도록 패주고 싶다.

* 너희 같은 악질적인 녀석들은 첨 본다.

* 그 따위 실력으로 대학에 어떻게 갈래?

* 맙소사! 그렇게 멍청한 말을 하다니.

* 자식들이 입만 살아가지고!

* 그만 끝내라. 언제까지 날 여기 앉혀둘 작정이냐.

* 조심해. 낙제점을 받은 녀석은 계엄령에 따라 총살할 거야.

* 아주 괴발개발 잘도 쓰는구나.

* 내가 너희 같은 녀석들한테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 너희들은 구제불능이야.

* 당장 창밖으로 던져버릴 테다!

* 넌 대체 어떤 집 자식이냐? 보나마나 엉망인 집구석에서 자랐겠지.

* 난 너한테 빵점을 줄 수도 있어.

* 주둥이 닥치고 있어!


 발달심리학적 지식은 대폭 부족하고 학습이론 따위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김나지움 교사에게는 교육학에서 단 하나의 처방 레퍼토리면 족한데, 그것은 19세기 프로이센 군대 특무상사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교사는 물론 학생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김나지움에서는 단일 경작이 행해진다. '학생들', '학급' 그리고 교과 내용만이 있을 뿐이다. 개개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봐요 선생님들, 우릴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 우린 그저 벽 속의 벽돌들일 뿐이죠. 선생님들도 마찬가지, 벽 속의 똑같은 벽돌들일 뿐이죠."
-핑크 플로이드, <Another Brick in the Wall>에서

 "저희도 이제 다행히 그 선생님에게서 벗어났습니다."는 학부모의 안도감,

 "까마귀는 다른 까마귀의 눈을 뽑지 않는다."는 교사들 간의 직업적 연대의식...

 마초처럼 굴면서 교사를 습관적으로 깔아뭉개고 아이가 받은 점수가 부당하다면서 항의를 하거나, 아니면 아무 관심 없이 직장 일에만 충실한 아빠들. 버릇없는 자식 뒤를 늘 히스테리컬하게 따라다니고 대학물 좀 먹었다고 뭐든지 다 잘 아는 척하는 달리 별로 할 일도 없는 극성 엄마들, 첫 번째 생활통지표를 나눠주기 무섭게 응석꾸러기 자식의 유년기가 곧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갱년기의 울보 엄마들, 행실 나쁜 자식의 도시락을 한 번도 싸준 적이 없는 파마머리의 하층민 엄마들.

 그들 모두가 악의로 똘똘 뭉쳐 비열한 비난을 일삼으면서 교사를 공격한다. 학부모회의에 모여 흥분하면서 자기 아이들을 맡은 무능한 인간 무리에게 야유하고 사사건건 참견한다.

 다른 분야에서 공장장, 매니저, 인사부장들이 자랑하는 효율적인 품질관리 대신에 학교에서는 과거의 철옹성 정신이 지배한다. 학교는 교사의 수업방식을 비판하고 어느 정도의 개선을 촉구하는 학부모들을 철저히 방해하며, 명백히 무능한 교사를 아이들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모든 시도를 사전에 무산시킨다. 교사들은 배척의 세계 챔피언이다. 교육청과의 밀약 아래 교사 집단이 활동하는,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새장 안에 학부모들은 들어갈 수 없다. 아무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능하고 화난 교사는 천하무적이다.

 "트링크아우스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아기들은 처먹는 기계일 뿐이래."

 "정말 그랬다니까."

 "그 선생님은 완전히 돌았어."

 "그 선생님이 제 딸의 일기장을 뺏어서 큰 소리로 읽었어요."

 "어제 제 아들을 교실에서 쫓아냈어요. 그 애가 이유를 묻자 주둥이 닥치고 꺼지라고만 했대요."

 "제 딸은 지금까지 벌써 네 번이나 그 선생님한테 구두점을 찍는 규칙을 언제 설명해 줄 건지 물어봤어요. 그런데 매번 그러겠다고 약속하고는 전혀 지키지 않았어요. 자료를 좀 더 찾아야 한다고 그랬대요. 게다가 그 문제는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답니다."

 "이 반에서 나오면 성호를 세 번 긋는다."

 "이 학교를 떠날 수 있는 날짜만 세고 있다."

 트링크아우스 선생님의 어록이다.

 또한 독일어 파일을 흘끗 보기만 해도 실제 수업다운 수업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주 간단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은 받아쓰기를 할 텍스트를 미리 알려주기도 했고 생물 시험 때는 교실 안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오답을 지적하고 얼른 고치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어떤 남학생의 어머니가 트링크아우스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완력을 써서 의자에 앉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상황은 극에 달했다.

 트링크아우스 선생님처럼 무능한 사람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장학관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지금의 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보다 더 심한 일을 저질러야 합니다."

 이를테면 무슨 일?

 "독일에서 공무원을 파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려면 여학생의 팬티를 벗기는 정도의 일을 저질러야 합니다."

장학관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아이들은 큰 탈 없이 봉변을 모면한 겁니다."

 "저는 그 선생님이 더 이상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실제로 어떤 남교사가 여학생의 팬티를 내리면 어떻게 될까? 열네 살 여학생들을 105번이나 성폭행했다고 고발당한 53세의 김나지움 교사는 법정에서 법적 보호대상자에 대한 성폭행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법원은 결국 그에게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자백을 한 덕에 그 교사는 12개월 미만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래서 계속 공무원 신분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가 그것을 꼭 원한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그의 연금 청구권 또한 계속 유지될 것이다. 그 교사의 해임 여부는 행정재판소의 징계위원회가 결정한다. 학교 당국에 따르면 그때까지 몇 년이 소요될 수 있다고 한다. 그 몇 년 동안 그 김나지움 교사는 삭감된 봉급을 받을 것이다. 매달 '겨우' 350만원을.

 "젊은이에게 뭔가를 가르치는다 는 것은 들통에 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붙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나쁜 교사들은 오로지 지배와 복종밖에 모른다. 비꼼과 빈정댐으로 만든 가면 뒤에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거나, 반대로 아이들 앞에서 참을 수 없이 친한 척한다. 하지만 자신의 자아도취적 욕구가 충분히 주목받지 못하면 모든 병적인 자기중심주의자들이 그런 것처럼 모욕당한 듯한 반응을 보인다. 사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인정, 갈채, 감사뿐이다. 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일과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갈채에 중독된 욕망만이 중요할 뿐이다.

 학부모로서 교사와 면담하려고 하며 한창 잘나가는 성형외과 의사의 보험 환자가 된 듯한 기분이 살짝 든다.

 좋은 교사의 요건은 그런 교사한테 배워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많은 영국 화물차에는 이런 스티커가 붙어 있다.

 "제 운전이 어떻습니까?  000-0000로 전화주세요. "

 자아비판을 할 용기를 가지라! 나는 바로 그 점을 학교 교사들에게 바란다. 수업은 사적인 용무가 아니다.

 "제 수업이 어떻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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