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세종이 경연에 풍수 전문가를 초빙하라고 명하자, 신하들은 ‘거룩한’ 유학을 논하는 자리에 풍수는 당치 않다는 주장을 펼쳤다(안숭선). 그러자 세종은 “이단이라도 그 근원을 캐 봐야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신하들이 ‘요망한 술법’이라며 풍수에 대한 지식을 진술한 최양선을 처벌하라고 간하자 세종은 “비록 꼴 베는 사람의 말이라도 또한 반드시 들어 보아서 말한 바가 옳으면 채택하여 받아들이고, 비록 맞지 아니하더라도 또한 죄주지 않는 것이 아래의 사정을 얻어 알고 자신의 총명을 넓히는 것”이라면서 신하들의 편협한 세계관을 꾸짖었다.


정조는 조선에 새로운 기류가 흘러드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던 사람이다. 개혁군주가 아니라 오히려 복고주의 군주였던 것이다. 조선이 쇄국과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어쩌면 정조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세목(細目)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조선을 통틀어 몇 안 되는 걸작으로 손꼽히는 <열하일기>를 푸대접했다면 분명 안목이 뛰어나거나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망이 강했던 왕은 아니었다.


사족을 달자면 세종은 한글, 당태종은 <정관정요>으로 기억되는 태평성대를 남겼다. 반면 정조는 자기 시대의 가장 뛰어난 작품을 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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