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교사는 무슨 권리로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고 아이들에게는 반대하거나 자기 의견을 개진할 가능성을 주지 않는가?
 교사는 우선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신뢰부터 얻어야 한다.

 "내가 너처럼 생겼다면 차라리 슈퍼마켓 계산원 일이나 하겠다."

 김나지움의 한 교사가 시험에서 최하 점수를 맞고 울음을 터뜨린 여학생을 비웃었다.

 교사들은 종종 학생들을 무시하고 부당하게 대우하고 자신의 재능이 없다고 믿게 하고 외모와 성격과 출신 배경을 가지고 창피를 준다.
 학생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수많은 행동들이 과거의 회초리와 징계 조치들을 대체하고 있다. 허튼소리, 얕보는 제스처, 무시하는 시선과 바보 같은 농담은 과거 학생들을 길들이는 수단이었던 꿀밤 먹이기나 회초리질보다 고통이 덜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당하고 만성적으로 악의적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훨씬 더 큰 상처를 준다.
 이 경우 어떤 아이들은 내면으로 후퇴하고, 어떤 아이들은 공격성을 밖으로 분출한다.
 교사가 교실 문을 닫는 순간부터 그곳에는 교사와 학생들만 존재한다. 특별히 어떤 문제가 생길 때에나 학부모들의 개입이 허락된다. 그것도 주로 상급학교 진학이 문제가 될 때.
 교실 문을 닫고 나면 그때부터 교사는 왕이다. 하지만 신하들의 신의와 충성심을 구해야만 하는 불쌍한 왕이다. 게다가 대개는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압력을 행사하고 부정한 방법을 써서 변덕스럽게 다스린다. 사실 교사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는 의문을 여기서 입 밖에 내도 괜찮을 것이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올 수 있다면 과연 몇 명이나 내 앞에 앉아 있을까?"

 처음부터 교사를 적으로 간주하는 학생은 없다. 적이라는 인상은 하룻밤 사이에 생기는 게 아니라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발생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다른 서른 명의 아이들과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서 일주일의 대부분을 몇 녀 동안 같이 보낸다. 이런 온실에서는 적의 이미지가 절로 번성한다. 학생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교사의 갖가지 반응을 매일 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부모들도 우연히 그런 경험을 하면 학생들과 똑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무시, 망신 주기 또는 무관심과 억측, 비열한 암시가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에게 받는 고통  만큼 많은 고통을 교사들에게서 받는다는 증거는 많이 있다.
 "선생님들은 과잉반응을 해요. 이유를 대며 반박하면 야비하게 나오죠. 누가 이의를 제기하면 명예가 손상되었다고 느끼는지 말도 못하게 불쾌하게 굴어요."
 마치 농노제도처럼 만사가 오로지 교사들의 호의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못된 김나지움 교사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선택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오지 못하는 자는 김나지움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그들은 독선적으로 잘난 척한다.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자!'가 그들이 교실에서 벌이는 공중전의 바탕이 되는 비밀스런 신념이다. "설명하고 해석해!" "책을 펴고 세 번째 단락을 읽어!" "내가 방금 한 말을 되풀이해봐!" 등의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은 그들에게 자꾸 똑같은 질문만 하게 만드는 점점 굳어가는 머리를 불완전하게 감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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