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는 본질로서 존재한다. 의자의 본질은 단적으로 '앉는 것'으로, 의자의 본질은 개별적 의자보다 중요하다. 만약 특정 의자가 다리가 부러져서 '앉는 것'이라는 본질을 상실했다면, 그 의자는 폐기될 것이다. 의자에게 본질은 무엇보다도 선행한다. 마찬가지로 돼지도 본질로 존재한다. 돼지의 본질은 '먹는 것'이다. 물론 돼지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반대의사를 개진하지 않으니 우리가 규정하자. 만약 병에 걸려서 못 먹게 되었다면, 돼지는 본질을 상실했으므로 살처분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존재도 생각해보자.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말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신의 피조물'인가? 이 물음은 오랜 시간 서구 역사에서 종교와 철학과 과학으로 심도 있게 논쟁되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본질을 상실하면 인간을 파기할 만한 본질은 찾을 수 없다. 말하지 못해도 인간은 가치가 있고,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인간은 가치가 있다. 즉 인간은 의자나 돼지처럼 단일한 본질을 갖지 않는다. 이렇게 고정된 본질을 갖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존재자에 대한 이름이 '실존'이다. 인간은 실존 방식으로 존재한다.

문제는 규정되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을 억압적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집단들이 있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 가족, 관습,도덕, 종교, 철학, 과학은 우리를 본질로 규정하려고 한다. 우리는 '국민'으로, '아들과 딸'로, '피조물'로, '이성적 존재'로, '회사원'으로, '군인'으로 규정되어 왔고, 스스로 그것이 자신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나의 본질이 아니며, 나는 본질을 가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렇다면 본질로 존재하지 않는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에게 뒤집어씌워진 본질을 하나씩 벗어내고 어떠한 규정과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면, 나에게는 단지 세 가지만이 남게 된다. 그것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규정되지 않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실존하는 존재다.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저주는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강조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채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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