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口技

from 좋은글모음 2022. 10. 10. 18:32

구기口技
서울에 구기를 잘 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손님을 모아 잔치를 여는데 대청의 동북쪽 구석에 여덟 폭 병풍을 펴고 구기 연기자가 병풍 안에 앉았습니다. 탁자 하나, 의자 하나, 부채 하나, 나무토막 하나만 놓였습니다. 많은 손님을이 둘러앉고, 잠시 후 병풍 안에서 나무토막을 두 번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숨을 죽이고 떠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멀리 깊숙한 골목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아낙이 놀라 깨어 하품을 하고는 사내를 흔들어 방사房事를 요구했습니다. 사내는 잠결에 중얼거리면서 처음에는 시큰둥합니다. 아낙이 계속 흔들어 깨우고 두 사람의 소리가 점차 뒤섞이더니 침상이 삐꺽거립니다. 이윽고 아이가 깨어 크게 울자 사내가 아낙에게 아이를 달래라고 합니다. 젖을 물리자 아이는 젖을 물고 칭얼대고 아낙은 아이를 다독이며 자장자장 달랩니다. 사내가 일어나 오줌을 누고 아낙도 아이를 안고 일어나 오줌을 눕니다. 침상에선 또 큰아이가 꺠어 칭얼칭얼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 때 아낙이 손으로 아이를 토닥이는 소리, 입으로 웅얼웅얼 달래는 소리, 아이가 젖을 물고 칭얼대는 소리, 큰아이가 막 깨는 소리, 사내가 큰아이를 꾸짖는 소리, 요강에 오줌 누는 소리, 오줌통에 오줌 누는 소리 따위의 온갖 오묘한 소리가 일시에 다 납니다. 자리를 가득 메운 손님들이 목을 뺴고 눈알을 굴리며 미소를 띠고 말없이 탄식하면서 절묘하다고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윽고 사내가 침상에 올라 잠들고 아낙은 큰아이를 불러 오줌을 뉘고는 다 같이 침상에서 잠을 잡니다. 작은아이도 점차 잠이 듭니다. 사내의 코 고는 소리가 시작되고, 아낙이 아이를 다독이는 소리가 점차 수그러듭니다. 찍찍 쥐 소리가 가늘게 들리더니 접시와 그릇이 넘어지고 엎어집니다. 아낙이 잠결에 쿨룩거립니다. 손님들의 마음이 조금 느긋해져 자세가 점차 바로잡혔습니다.
별안간 한 사람이 "불이야!"라고 크게 외치자 사내가 일어나 크게 외치고, 아낙도 일어나 크게 외치고, 두 아이가 일제히 울어댑니다. 갑자기 수백 수천 명이 크게 외치며, 수백 수천 아이가 울며, 수백 수천 마리 개가 짖어댑니다. 그 사이에 집을 끌어당겨 무너뜨리는 소리, 불이 터지는 소리, 횡횡 바람 소리가 수배 수천 함께 일어납니다. 또 수백 수천의 살려달라는 소리, 집이 흔들리는 소리, 물건 빼앗는 소리, 물 뿌리는 소리가 섞여 나옵니다. 나야할 소리가 모두 나고 없는 소리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손이 100개가 있고 손마다 손가락이 100개가 있다 해도 어떤 소리 하나도 끄집어낼 수 없고, 사람에게 입이 100개가 있고 입마다 혀가100개가 있다 해도 어느 한군데도 이름 붙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손님들은 낯빛이 변해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떨쳐 팔뚝을 내놓고 두 다리를 후들거리며 모두들 먼저 나가려고 서둡니다. 문득 나무토막을 한 번 내려치자 모든 소리가 끊기고, 병풍을 걷자 사람 하나, 탁자 하나, 의자 하나, 부채 하나, 너무토막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임시환, "추성사자서秋聲詩自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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