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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문을 읽다보면 그 속에 인용된 또 다른 고문과 고사, 일화 때문에 다른 책을 들쳐봐야할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연암의 글은 그렇지 않다. 연암의 글은 잘 읽힌다. 어찌 보면 쉽고 평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살며시 미소를 짓다가도 마지막엔 눈시울이 뜨거워지게 된다.
 고전을 읽는데 도우미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나는 연암의 내면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다음은 이 책에 실린 한 꼭지를 요약한 내용이다.

 유인孺人 휘諱 모某는 반남潘南 박씨朴氏인데, 그 동생 지원趾源 중미仲美가 다음과 같이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德水 이씨 택모模 백규伯揆에게 시집가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으며 신묘년辛卯年(1771)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나이 마흔 셋이었다. 남편의 선산은 아곡인바 장차 그곳 경좌庚座 방향의 묏자리에 장사 지낼 참이었다.

 백규는 어진 아내를 잃은 데다가 가난하여 살아갈 도리가 없자 어린 자식들과 계집종 하나를 이끌고 솥과 그릇, 상자 따위를 챙겨서 배를 타고 산골짝으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나는 새벽에 두뭇개의 배에서 그를 전송하고 통곡하다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에 얼굴을 단장하시던 일이 마치 엊그제같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발랑 드러누워 발버둥을 치다가 새신랑의 말을 흉내 내 더듬거리며 점잖은 어투로 말을 하니, 누님은 그 말에 부끄러워하다 그만 빗을 내 이마에 떨어뜨렸다. 나는 골을 내 울면서 분에다 먹을 섞고 침을 발라 거울을 더렵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으로 만든 자그만 오리 모양의 노리개와 금으로 만든 벌 모양의 노리개를 꺼내 나를 주면서 울음을 그치라고 하였다.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득 강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의 시집가는 날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 달은 유독 어릴 적의 일이 생생히 떠오르는데 그때에는 또한 기쁨과 즐거움이 많았으며 세월도 느릿느릿 흘렀었다. 그 뒤 나이 들어 이별과 근심, 가난이 늘 떠나지 않아 꿈결처럼 훌쩍 시간이 지나갔거늘 형제와 함께 지낸 날은 그리도 짧은지.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해도

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이 외배 지금 가면 어느 때 돌아올꼬?

보내는 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

 정情을 따르면 지극한 예가 되고, 정황을 묘사하면 참된 글이 되는 법이거늘, 글에 어찌 정해진 법도가 있겠는가, 이 작품은 고인古人(옛사람)의 글인 양 읽으면 의당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이 없겠는데, 금인今人(지금 사람)의 글로 읽는 까닭에 의혹이 없을 수 없다. 그러니 상자에 감춰두기 바란다.

-이재성在誠(1751-1809)

 정을 표현한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해야 비로소 진실되고 절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선생(연암)의 시를 읽고서 눈물을 흘린 적이 두 번이었다. 처음은 선생께서 그 누님의 상여를 실은 배를 떠나보내며 읊은 다음 시, 즉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해도 / 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 이 외배 지금 가면 어느 때 돌아올꼬? / 보내는 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라는 시를 접했을 때다. 나는 이 시를 읽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림을 금할 수 없었다.

 이 글은 채 3백 자도 안 되지만, 진정眞情을 토로해 문득 수천 글자나 되는 문장의 기세를 보이니, 마치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 수미산須彌山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겠다.

-이덕무德懋(1741-1793)

 이 글은 현재에서 과거로 들어갔다가 다시 현재로 빠져나오고 그런 연후에 다시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등 굴곡과 변전變轉이 심한 글이다. 이런 글쓰기를 통해 연암은 의도적으로 기억과 현재의 풍경을 마주 세우고 있으며, 이 마주 세움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절묘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이 글에서 기억이란 단순히 과거의 재현이 아니요, 과거와 현재의 관계, 더 나아가 현재에 대해 발언하는 하나의 미적 방식이 되고 있다.

-박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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