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너무 충실하게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했기에 민비는 도리어 그러한 간섭을 싫어하였다. 30년 동안 방사(放肆)한 생활을 해 온 조선인들은 일본을 혐오하였지만 러시아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였다. 러시아는 조선 내치의 문란을 돌보지 않고 오직 자기네 세력을 부식하고 이권을 확장하며 결과적으로 조선을 점유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조선 왕실에 대해서도 감언이설로 환심을 사려 애썼을 뿐 어떠한 압박이나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민비는 약소국인 주제에 자꾸 간섭을 하는 일본보다는 강대국이면서도 온정이 있어 보이는 러시아 측에 더 의지하고 싶어 했다. (중략) 따라서 그 동안 일본이 성심성의를 다해 성취한 개혁을 조선 왕실은 자기네 마음대로 파괴하였는데도, 일본은 외교적 절충만으로 그것을 저지하려다 실패하고 말았다. 하물며 러시아 세력의 앙진을 겨우 외교상의 수단만으로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더더욱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면 일본이 마땅히 취해야 할 방도는 어떤 것이겠는가. 오직 비상한 수단으로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즉, 러시아와 조선 왕실이 굳게 손잡고 온갖 음모를 추진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문자 그대로 일도양단, 그 한쪽의 손을 잘라내어 양쪽의 악수가 불가능하게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왕실의 중심인물인 민비를 제거함으로써 러시아와 조선의 결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수밖에 다른 좋은 방법이 없었다.”

“영리하고 매력적이며 야망을 가졌던, 여러 면에서 사랑스럽기조차 했던 한국의 왕비는, 그렇게, 우호국 공사의 부추김을 받은 낯선 외국인들의 손에 의해 마흔 넷의 나이로 죽어갔다. 그녀가 살아 생전에 여러 가지 신임을 받았던 이노우에 백작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한국 사람 가운데는 왕비의 명민함과 빈틈없는 성격을 따를 만한 자가 없었습니다. 특히 적들을 회유하거나 측근들의 신뢰를 획득하는 기술에서 그녀는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훈련대원들은 일본인들을 따라 궁내의 모든 방향에서 떼 지어 몰려들었고, 민간 복장에 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왕비의 소재를 미친 듯이 따져 물으며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와락 몰려가서 온통 뒤지고 궁 안에 있는 2.1미터나 되는 베란다에서, 대기하고 있는 궁녀들을 내던지기도 하였고, 칼로 베고 발로 차고, 심지어는 궁녀들의 죽음이 그들의 희생물(왕비)을 확보해 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무자비하게 죽여 버리기 조차 하였다.
 일본 군대도 궁 안으로 들어와서 그들 장교의 명령 아래 군대 열을 짓고, 암살 작업을 하고 있는 자객들을 지켜주기 위하여 임금 처소의 작은 마당 주위와 그 문 앞을 막아섰다. 이 일본 정규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는 하인들, 잔심부름꾼들, 왕실 호위병 등 흥분한 궁 안의 무리들이 밖으로 빠져 나오기 위하여 미친 듯이 날뛰며 담을 뛰어 넘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처소 안으로 들어왔을 때, 불운한 임금은 그들의 주의를 분산시켜 왕비에게 피신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방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일본인 자객들은 대검을 휘두르며 임금을 밀어내고, 그의 면전에서 궁녀들 머리채를 질질 끌고 다녔다. 내실에 있었던 왕세자도 끌려나왔으며 왕비가 있는 곳을 대라며 시퍼런 칼로 위협 당하였다.
 이 모든 일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왕세자는 그의 어머니가 칼 가진 일본인들을 피해 달아나는 것과, 왕비를 따라 자객들이 그 처소에 달려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궁녀들과 함께 발견된 공주는 머리를 끌리고 칼로 베어져 아래로 내던져졌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경보를 울린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때 왕비가 옷을 갈아입고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암살자들이 몰려들어왔을 때, 그는 왕비 앞에 두 팔을 펼쳐 그녀를 보호하려 하였다. 그들이 그의 두 팔을 내려치고 여기 저기 상처를 입혔는데도, 이경직은 있는 힘을 다하여 그들을 막다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자객들을 피해 도주한 왕비는 곧 그들에게 잡혀서 칼에 찔렸다. 곧 이어 자객 하나가 그녀의 가슴 위로 덮치면서 대검으로 베었다... 일본인들은 그녀를 비단으로 된 누비이불로 꽁꽁 묶어 널판 위에 누인 후에, 사슴공원(鹿山) 부근의 작은 소나무 숲으로 운반해 갔다. 그 곳에서 등유를 몸 위에 붓고 장작을 둘러치고 불태웠으니, 남은 것은 몇 개의 뼈 조각뿐이었다.“




이  자료를 보면 명성황후 나름대로의 일관된 목표는 아마도 일본의 간섭 배제와 독립 유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시아와 한국에 대한 비숍의 시각은 문제가 없지 않다. 비숍의 기록을 읽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1894년부터 4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11개월에 걸쳐 현지답사를 한
 영국의 작가이자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저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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