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이 호시탐탐하는데 일본이 우유부단하면 기회를 잃을 것이다

- 운요호 사건과 조선의 타율적 개항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 제국주의 국가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 간에 식민지 쟁탈전이 격화되는 가운데 일본은 1870년대부터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과 조선의 영토를 정복하고 약탈하는 침략의 길로 나아갔다.

 1872년 일본은 중국과 종속관계에 있던 오끼나와 제도를 정복하였으며 1874년에는 대만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였다. 조선에 대한 침략도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미 대원군 집권 시기에 그들은 ‘국교 개선’이란 명목 하에 조선에 대하여 수차례 침략적 요구를 제기하여 왔으나 대원군의 완강한 통상거부정책에 의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게 되자 1872년경부터 일본 군벌들은 무력으로 조선을 정복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정한론’은 일본 지배층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아 한 때 일본내각회의에서 정식 의결되어 구체적인 조선 침략 계획까지 작성되기도 하였다.

 1875년 5월, 일본 정부는 조선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불의의 사변’을 날조하였다. 그들은 ‘연습 항해’라는 명목 하에  운요호를 포함, 군함 3척을 우리나라 남동해안 일대에 파견하여 조선 연해에서 정찰을 실시하는 한편, 부산항 내에서 함대의 전투연습을 실시하는 등 고의적인 도발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그와 같은 만행에 대하여 조선 정부는 적극적인 항전대책을 강구하기 보다는 일본에 대해 엄중 항의하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에 고무된 일본은 1875년 9월 군함 운요호를 동원 또 다시 예고 없이 강화해협에 불법 침입하였다. 우리 해안포대는 적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운요호에 대해 포격을 가했다. 우리 측으로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한 자위권의 발동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불의의 포격’에 대한 ‘보복적 공격’이라는 명분 하에 본격적인 무력 침공을 개시하였다.

 1876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사태에 대하여 오히려 조선정부에 그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 하에 대함대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군사적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조선정부에 속히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그들의 요구조건을 들어 줄 조약체결을 위한 교섭을 개시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함포를 쏘아대면서 교섭이 결렬되면 개전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였다. 그들이 벌인 이른바 ‘포함외교’는 당시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상투적 수법이었다.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해 그와 같은 방법으로 개항을 당했고, 그들은 자신이 당한 방식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시킨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사람들은 모두 격분하여 일본의 요구를 빨리 거절하고 이를 격퇴할 것을 조선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였다. 유생들은 연일 상경하여 국왕에게 왜적을 격퇴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일부 군인들과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침략자들과 일전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런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박규수 등 통상개화론자들이 개항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었다. 박규수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청이 서양의 대포와 화륜선(火輪船)4)을 모방 제조하여 사용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많다.” 고 보고하며 통상 개화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비록 조선이 문호를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열강의 군사적 침략을 피하기 위해서는 개항이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민씨정권은 서양 세력 배척의 구호를 내세워 척사파의 반발은 무마하되, 청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일본과의 옛 관계를 부활한다는 명목 하에 조약의 체결을 추진해 나갔다.

 조선 정부의 조약 체결 방침이 알려지자 일본과의 수교를 결사반대하던 척사파의 최익현은 1876년 1월 23일 도끼를 갖고 올라와 국왕의 행차 길을 막고 일본과의 조약을 거부하도록 이른바 ‘5)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며, 개화된 일본은 서양 오랑캐와 같으므로(倭洋一體論) 일단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 그들의 침략을 막기 어렵고 우리나라는 결국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민씨정권의 대외정책은, 청국과의 전통적인 종속관계에 의존하는 가운데 일정한 개방정책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즉 대원군 정권의 통상 수교 거부정책 특히 대일 강경외교에 반대하여 대원군 계열의 외교 담당자들을 처단·파면하고 대일 유화외교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들은 준비도 없이 일방적으로 무장해제를 하듯 개방정책을 취하여 나라의 위기를 촉진시키고, 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을 부르짖던 일본에게 조선 침략의 기회를 엿볼 틈을 주고 말았다.

 민씨정권은 결국 일본 측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하여 개항과 수교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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