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여도 내가 용서 못한다.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

  흥선대원군의 내정 개혁 목표는 전제왕권을 강화하여 왕실의 위엄을 되찾고 그 뿌리를 바로 세우는 데 있었다. 그는 우선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을 몰아내고 몰락한 남인, 북인당파와 지방의 토호까지 기용하는 등 평등한 인재 등용을 표방하고 실천하였다. 이는 당시 민중들의 공격 대상이었던 지방의 탐관오리들을 일부 경질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외척의 세도정치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함으로써 통치기구를 재편성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는 세도가들에 의해 장악되었던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폐지하고 의정부가 정부의 모든 사무를 주관하게 하는 한편, 비변사를 대신하여 군국사무를 전담할 기관으로 삼군부(三軍府)를 다시 설치했다. 아울러 법치질서의 확립을 위하여〈대전회통 大典會通〉을 편찬 간행하는 등 법전 및 운영규칙을 정비했다

  또한 서원의 신설을 금지하며 기존의 서원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축소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서원은 외척이나 노·소론 당파들과 긴밀히 연결된 지방 양반들의 소굴로서 많은 면세토지와 노비 등을 가지고 권세를 부려 지방 사회에 끼치는 폐단이 극심했다. 그리하여 지방 양반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71년에 가서는 전국 6백여 개의 서원중에서 사액서원5)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이에 양반들이 대대적으로 저항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여도 내가 용서 못한다. 하물며 선현께 제사를 지내는 곳에 도적이 숨어서야 되겠느냐?”며 서원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 국고에 귀속시켰다.  서원의 철폐로 국가재정은 확충되었으나, 지방 양반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후일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한편, 세도 정권 붕괴의 원인은 삼정의 문란6)과 그에 따른 농민 봉기의 확산에 있었다. 따라서 대원군 정권에 떠넘겨진 가장 시급한 과제는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먼저 전세 행정을 개혁하기 위하여 전세 부과의 기준이 되는 토지를 정확하게 조사하는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군포 행정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인두세로 부과되던 군포를 신분에 관계없이 호당 1필씩 내게 하는 호포제의 실시로 양반들이 상민과 같이 군포를 부담하게 되었고, 상민들은 장정 수에 관계없이 호당 1필씩 부담하게 되어 그 부담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삼정 중 폐단이 가장 심했던 환곡은 수령과 아전들을 배제시키고 민간에서 운영하는 사창제로 바꿈으로써 관리들에 의한 부정과 비리를 차단하려고 노력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 60여 년 동안 추락한 왕실의 위엄을 되살리기 위해 경복궁 중건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 대역사는 불행하게도 일반 백성들로부터도 큰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문제는 막대한 재정의 조달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다시 짓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반강제적으로 막대한 기부금을 거두어 들였다. 대원군정권은 그 기부금을 원해서 내는 것이라 하여 ‘원납전(願納錢)’이라고 불렀으나, 백성들은 강요에 못 이겨 원망하면서 내는 ‘원납전(怨納錢)’이라고 불렀다.

  또한 부족한 재정을 타개하기 위해 발행한 악화 당백전(當百錢)은 더 큰 혼란을 야기했다. 조선시대의 화폐는 요즘의 화폐와 달라서 그 자체가 ‘실물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즉, 상평통보 한 닢의 가치는 그것을 주조하는 데 든 구리만큼의 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원군이 상평통보의 5,6배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당백전을 상평통보의 100배에 해당하는 값으로 강제 통용시킴으로써 혼란이 야기되었다. 말하자면 5원 짜리 동전을 100원짜리로 통용시킨 셈이었다. 백성들은 처음에 당백전을 기피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평통보를 녹여서 당백전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악화(당백전)가 양화(상평통보)를 구축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물가가 1∼2년 사이에 무려 6배까지 폭등하고 화폐제도 전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도성의 출입문들에서 백성들로부터 통행세까지 징수하는 등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2천 5백만 냥의 막대한 경비 조달과 백성들의 부역동원을 통하여 착공 40개월 만인 1867년 6월에 경복궁은 완공되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 사업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고 국가 재정은 탕진되었다. 당시 경복궁 공사장에 수차례의 방화사건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 사업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알 수 있다.

  대원군의 내정개혁은 매우 강력했다.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에게 군포를 부과한 것은 이전의 그 어떤 국왕, 또는 정치가도 하지 못했던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개혁은 기울어져 가는 조선왕조체제를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호포제 실시와 서원 철폐는 그것을 목적으로 한 재정 타개책이었다. 이미 70%에 이른 양반 계층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하여 조선 왕조가 망하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가 실시한 호포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원군이 추구한 개혁은 근대적인 체제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체제의 재확립을 꾀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의 개혁은 전근대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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