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

─ 결혼생활 ─

 남녀의 결혼은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시부모를 섬기고 아들을 낳아 대를 잇게 함에 있었다. 그러므로 부부금슬이 아무리 좋아도 부모가 마땅치 않아 하면 아내를 버려야되는 것이 효자의 도리였다. 둘 만의 사랑이란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여자란 것은 겨우 10세를 내 집에 매인 몸이요, 그 후 100년을 시집에서 마치니' 시집온 순간부터 그 집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이 시대 여성에게 지워진 운명이었다.

 '시집살이'는 아주 특수한 신분을 빼고는 홍역과 같은 시련이었다. 몸과 마음이 고달픈 데다가 경제적인 고통까지 가중되어 행주치마 자락이 마를 날 없이 눈물 짓고 더 심하면 쫓겨가고, 때로는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일까지도 있었다. 시집살이의 제일 가는 어려움은 강도높은 노동에 있었다. '소를 잃으면 며느리를 얻으라'는 말처럼 며느리는 소 한 마리 몫의 일을 해내야만 했다. '5리 물을 길어다가/10리 방아 찧어다가/아홉 솥에 불을 때고/열두 방에 자리 걷고…'하는 민요의 한 구절은 고달픈 노동의 나날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시집살이'라는 말은 단지 고된 노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아버지 호랑새요/시어머니 꾸중새요/시누이 뾰죽새요' 그런데 '남편은 미련새'고 '나는 썩는 새'이니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으로 살아야만 했다. 여기에 '시집온 지 사흘 만에/부엌이라고 내려가서/가마뚜껑 열어보니/엉거미가 줄을 치고…'있는 가난이란 '배고픈 설움'도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성의 권리가 억압되어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적인 예가 '소박'이다. 죽도록 일하고 툭하면 내쫓기는 게 여자들이었다. 아내를 일방적으로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의 죄목이 있었으니 이것을 '칠거지악'이라고 했다. 칠거지악은 시부모에게 순종치 않는것, 말이 많은 것, 폐병에 걸리는 것, 아들을 못낳는 것, 도벽, 음란, 투기(질투) 등을 말하는데 이런 정도면 여자 쫓아내는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할 수 있다.

 부부생활도 자유롭지 않았다. 특히 법도있는 집안에서는 의례히 남자는 사랑방에, 여자는 안방에 거처하며 젊은 부부는 시어머니의 허락이 나지 않는 한, 한 방을 쓸 수가 없었다. 만일 이를 어기면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글공부에는 생각이 없고 안방 출입만 한다'고 불호령을 듣기 마련이다. 그러나 명분상으로는 이같은 엄격한 감시 아래 한 달에 두세 번 한 방을 쓰는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뒤꼍을 통해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있어, 여기로 드나드는 것은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과부도 많았다. 과부의 재혼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먼저 죽은 경우 모두 과부로 늙어야 하니 그 숫자는 엄청난 것이었다. 과부들의 생활은 남편이 있는 여자들에 비해 더욱 어려웠다. 남편없는 시집살이 설움은 둘째치고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개중에는 굶어죽는 여인도 없지 않았건만 이 시대에는 양반 '과부로서 굶어죽는 현실이 수절이라는 명분에 의해 외면당하였다.

 양반사회의 윤리는 서민사회에도 전파되어 과부들이 재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민사회에서는 '보쌈'이라고 불리는 과부 업어가기 풍속이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과부 업어가기는 말 그대로 약탈혼인 경우도 있었으나 미리 쌍방이 합의하여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타율적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가장된 일종의 재혼 방법이었다. 때로 여자측 남자 장정들이 몽둥이를 들고 약탈자(?)를 추격하는 시늉을 내기도 했다고 하니 재미있는 풍속이 아닐 수 없다.


기생이 없으면 영웅준걸이 죄에 떨어진다

─ 관기제도 ─

 조선시대 4대문 안에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양반들이었다. 그러나 양반이 아닌데도 4대문안에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노비와 기생이었다. 기생은 주와 읍의 관청에 딸린 관노비로서 봉건사회가 낳은 일종의 사치노예였다. 따라서 조선의 기생은 모두 '관기(관에 소속된 기생)'였는데 그 수가 전국적으로 3만 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고 한다.

 삼강오륜과 부부의 도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기생이 있었고 더구나 관에서 합법적으로 기생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이런 점도 역시 남성 중심의 사회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욕정은 가히 금할 수 없으므로' 관기제도를 두었고 관기는 공유이므로 누구든 이를 취해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합리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관기였던 춘향에게 변사또가 수청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태종과 세종이 한 때 이 관기제도를 폐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조정의 반대 때문에 관철되지 못하였다. '관기제도를 폐지하면 여염집의 여자를 탈취하여 죄를 짓는 영웅준걸이 많아진다'는 '필요악'의 그럴 듯한 이유로 포장되었던 것이다.

 관기는 서울 기생과 고을 기생으로 각 급마다 최하 20명에서 최고 200명까지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생들의 전성시대는 연산군시대였다. 연산군은 각 도에 채홍사(기생을 뽑는 관리)를 보내어 기생을 뽑아 올렸는데 그 수가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은 능라비단을 입으며 호강을 했다고 하니 조선시대의 기생은 여러가지 면에서 여염집 여성과는 사뭇 다른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양반 문벌제도가 뿌리를 내리는 조선 후기에 해당된다.
관기 이야기를 참조해 보면 관기였던 춘향의 수청 거부가 당시 법도에는 맞지 않는 행동임을 알 수 있다.
"관기제도가 없으면 영웅준걸이 죄에 떨어진다"는 주장은 오늘의 공창제도가 성범죄를 막는 필요악이라는 일부의 잘못된 주장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용숙, "한국여속사", 민음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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