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2)

from 역사이야기/정리 2008. 6. 24. 09:57
조선이 사신을 보내지 않는 것은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징후

  일본은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명나라 다음 가는 강국인 조선에 대해 약자의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도요토미의 통일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있었다. "우리 사신은 늘 조선에 가는데도 조선 사신은 오지 않으니 이는 곧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이 같은 도요토미의 말은 그와 같은 태도 변화의 시작이었다.

 변화된 일본의 정세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던 조선 정부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일행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곧 침략할 것이라고 했고, 부사 김성일은 그 의견에 반대했다. 물론 여기에는 동인인 김성일과 서인인 황윤길이라는 양자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좌의정이었던 유성룡이 "만일 병화(兵禍:전쟁)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하고 묻자, 부사 김성일은 "나도 역시 어찌 왜(倭)가 끝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다만 정사 황윤길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으므로 이를 해명하였을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부사 김성일이 성급한 전쟁설로 인한 국내의 혼란을 우려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오히려 일본 쪽에서 흘러나왔다. 선위사 오억령이 일본 국왕사 겐소 등을 접촉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곧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조선 정부에 알렸으나 그는 도리어 파직당하였다. 또한 부사 소오는 부산포에 들어와서 "도요토미가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에 알리고 이를 평화롭게 수습해야 한다"고 거듭 간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소오는 쓰시마 출신이었다. 쓰시마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끼어있는 이중성이 강한 지역이었다. 쓰시마는 양국간의 교역을 중개하여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쓰시마 도주로서는 되도록 전쟁을 피하고자 하였다. 쓰시마 도주가 일찍이 조선에 조총을 상납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조선 건국이래 남해안에서 왜인들이 난(삼포왜란, 사량진왜변, 을묘왜변)을 일으키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난들은 물자 교역의 제한에 불만을 품은 국지적인 난에 불과했다. 따라서 당시 조선 정부로서는 일본이 전면전을 감행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조선 정부가 전쟁의 가능성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때는 왜관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어 왜관이 텅비게 되면서부터였다. 이 때부터 성을 수축하는 등 뒤늦은 대비에 나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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