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3)

from 역사이야기/정리 2008. 6. 24. 09:59

신입은 실로 책략이 없는 사람이었다
-왜군의 상륙과 북상

  1592년 4월14일, 왜군의 대선단이 이동하여 부산에 상륙하였다. 일본이 동원한 병력은 출동병력 20여 만, 후방병력 10여 만, 모두 30여 만의 병력이었다. 고니시의 제 1대가 상륙하자 부산진에서 첨사 정발이 막았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하고 부산성은 함락되었다. 이어 동래가 함락되고 개전 초기 조선군의 육지전은 패전의 연속이었다.

 조선 정부가 희망을 걸었던 유일한 장수는 신입이었다. 그는 여진족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이름을 날렸던 맹장이었다. 그러나 신입은 지략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신입 휘하의 장수들은 모두 새재(鳥嶺:문경새재)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막을 것을 건의했으나 신입은 자신의 용맹을 과신한 나머지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 4월27일 신입은 군사를 거느리고 탄금대 앞의 두 강물 사이에 진을 쳤다. 문자 그대로 '배수(背水)의 진'을 친 것이다. 그곳은 왼쪽과 오른쪽에 논이 있고 물풀이 뒤섞여서 말을 달리기조차 불편한 곳이었다. 왜군들은 한 패는 산을 따라 동쪽으로 오고, 한 패는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조선군을 공격하였다. 왜군 조총부대의 삼교대 밀집사격(3열 횡대로 서서 교대로 사격, 화력을 집중시키는 전술)으로 신입의 조선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였다. 신입과 군사들은 거의 모두가 강으로 뛰어들어 빠져 죽었고 그 시체가 강을 덮어 떠내려갔다. 훗날 명의 장수 이여송은 왜군을 추격하여 새재를 지나면서, "이와 같이 험준한 요새지가 있는데도 지킬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신입은 실로 책략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장탄식을 했다고 한다.

 4월29일 충주 패보가 전해지자 수도 한양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유도대장 이양원, 도원수 김명원으로 하여금 한양을 방어토록 하고 평양으로 피난을 하였다. 조선군은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결사적 항전을 펼쳤으나 5월 2일 왜군 상륙 20일만에 한양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임진강 저지선마저 무너지자 조선 정부는 의주로 피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어 6월에는 평양마저 함락되어 일본의 조선 침공 40여 일만에 호남을 제외한 전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육지전에서의 패전 이유

 이렇듯 개전 초기에 조선 육군이 싸움다운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왜가 침공하랴'는 조선 정부의 안이한 정세 분석과 제도, 전술 상의 문제점이 육군의 패배 원인이었다.

 당시에는 농민들로부터 군포를 거두어 군사비로 사용하게 되어 있었는데 국가 정치 기강의 해이해져 군포 수입이 엉뚱한 데 사용되기 일쑤였다. 이는 곧 전반적인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전술상의 문제점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적의 침공시 식량과 무기를 성안으로 옮겨(급하면 태우거나 강물에 매몰시킨다) 적의 보급원을 차단하는 청야작전(淸野作戰)과 성에 들어가서는 주로 화살을 쏘아 적을 격퇴하는 수성전(守城戰)을 장기로 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왜군은 칼과 창을 가지고 돌격을 감행하는 근접전술이 뛰어났다. 이러한 점에서 개전 초기의 분수령이 되었던 신입의 탄금대 전투는 오히려 왜군의 장기를 살려준 전술적 오류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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