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5)

from 역사이야기/정리 2008. 6. 24. 10:01

수세에서 공세로의 전환
-조·명연합군의 반격

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있던 왜군은 명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명은 평양이 함락되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파병을 결정하였다. 7월에 요양 부총병 조승훈의 5천여 명의 병력을 1차 원군으로 파견하고 12월에 들어서 이여송 제독의 4만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2차로 파견, 본격적으로 참전하였다. 이여송군은 대포와 불화살로 치열한 공세를 퍼부은 끝에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여송은 후방의 적을 무시하고 계속 한양으로 진격하다 왜군 정예병의 매복 공격을 받고 벽제관에서 대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급이 끊긴 왜군은 속속 남쪽으로 후퇴하는데 구로다군은 개성으로 가토군은 서울로 퇴각하였다.

 이듬해 전열을 정비한 조선군의 반격이 전개되었다. 2월15일 행주산성에서 권율장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전세는 완전히 우리쪽으로 돌아섰다. 20배가 넘는 왜군을 격퇴한 이 장쾌한 승리는 군과 민이 합심하여 이룩해 낸 결과였다. 그러나 행주대첩 이후 권율 장군이 “우리에게 화차가 없었다면 승리는 불가능했다”고 말했다는 사실은 승리의 요인이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음을 일깨우 준다. 즉, 뛰어난 무기 제조술이 있었기에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4월 20일에는 도성 한양을 탈환하여 왜군은 패색이 짙어졌다. 다급해진 일본은 시간을 벌기위해 휴전을 제의하였다. 명의 파병은 조선의 회복을 위함이 아니라 왜군의 중국 진출을 막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입장은 우리와는 달랐다. 명은 심유경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휴전 교섭에 들어갔다. 일본은 명의 황녀로 일본의 후비를 삼고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하라는, 애초부터 성사되기 어려운 휴전 조건을 내세웠다. 심유경은 이러한 일본의 요구를 본국에 알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봉공안(封貢案 : 일본을 명의 속국으로 간주하고 일본 국왕을 제후로 봉한다는 내용)'을 일본에 보내 휴전 협상을 성사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정유년 재침을 명령하였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이나 남아 있사오니...
-왜군의 재침과 격퇴

1597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 왔다. 당시 왜군은 가토, 고니시, 소오가 이끄는 모두 1만 4,500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때 이순신은 고니시의 계략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의주로 압송되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원균이 삼도 수군통제사에 올랐으나 칠천량에서 대패, 전사하여 한산도 수비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육군이 호남과 호서지방을 장악하고 수군은 전라도 해안을 공격하는 왜군의 전략대로 8월16일에 남원이 함락되고 이어 전주까지 점령되었으며 구로다군은 직산까지 북상하였다.

 그러나 9월에 들어서 명군이 소사평에서 구로다군을 격퇴하고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에 기용되어 명량에서 대승을 거두어 왜군의 서진을 봉쇄하였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병선이 남아 있사오니 나아가 죽기를 각오로 싸운다면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순신은 절대절명의 상황에서도 명량 앞 울돌목의 급류를 이용하여 왜선단을 유인, 12척으로 300여 척의 적 함대를 격파하는 기적의 승리를 이루어냈다.

 겨울이 되자 왜군은 남해안으로 집결하여 왜성을 수축하고 장기전 태세에 들어갔다. 왜성은 둘레에 해자(연못)를 파고 성을 겹겹이 쌓아서 만든다. 왜군은 전투 시에는 맨 아래의 성부터 지키기 시작하여 그 선이 무너지면 바로 위의 성으로 철수하여 저항하였다. 이러한 왜성을 함락하는 데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명은 12월에 4만5천의 병력을 파견하여 울산을 공격하였으나 무위에 그쳤다. 이듬해(1598년)에는 병력을 증강시켜 14만 명의 군사로 울산, 사천, 순천 등지의 잔류 왜군을 총공격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후 조선과 명의 수륙군은 바다와 육지에서 왜성을 포위하고 물이나 식량을 구하러 나오는 왜군의 목을 베어 버렸다. 조명 연합군의 고사작전으로 왜성의 왜군들은 먹을 식량이 없어 말을 잡아먹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듬해(1598년) 8월 도요토미는 회군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하였다. 이에 따라 왜군은 철수를 시작하였다. 이 떄가 수륙협공 작전으로 왜군을 섬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명나라 제독 유정은 왜장 고니시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왜군의 퇴로를 열어 주었다. 뒤늦게 왜군의 철수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도주하는 왜선을 추격하였다. 그리고 노량해협에서 마지막 섬멸전을 벌여 200여 척을 격파하는 결전을 벌이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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