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6)

from 역사이야기/정리 2008. 6. 24. 10:02

국토는 황폐해지고 인구는 줄어들어
- 임진왜란의 영향

  전쟁과 왜군의 인명 살상으로 조선의 인구는 격감하였다. 왜군은 철수할 때 더욱 많은 사람들을 살상하였다. 한양이 수복된 후 도성 안에는 인마의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하였다. 왜군에게 잡혀간 부녀자, 어린 아이들은 노비가 되었다. 경제적인 피해도 막대하였다. 막대한 인명이 손실되고 농토가 황폐해져 국가 재정을 극도로 악화시켰고 양안과 호적이 거의 없어져 행정이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왜란이 끝난 후 50년 뒤인 광해군 때 인구 150만명 토지가 50여만결에 그칠 정도였다. 왜란 직전의 경지면적이 170만결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경제적 피해의 규모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한 경복궁과 불국사 같은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고 사고와 서적이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명은 대규모 원정군 파견의 후유증으로 점차 쇠약해져 갔다. 명의 세력이 약화되자 만주에 있던 여진족이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명청교체기가 도래하여 대륙의 정세는 혼미해졌다. 일본은 고대 문화의 일본 전파이래 단시일에 최대로 한국 문화를 수입하여 일본 중세문화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들이 가져간 [퇴계집]과 왜란 중 강제로 끌려간 성리학자에 의해 일본 성리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농민 포로, 납치된 도공에 의한 농업과 도예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활자의 유입으로 인쇄술도 발전하였다. 심지어 두부 제조술까지 받아들이는 등 일본은 전란을 통하여 이른바 도쿠가와 시대 중세문화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도움글 - 거북선은 돌격선

 조선 수군의 주력선은 판옥선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대략 판옥선 10척당 거북선 한 두 척의 비율로 선단이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거북선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전투는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진법’이 가장 중요하다. 즉, 해전에서 전선들이 진을 치는 방법이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조선 수군은 학익진(공격시), 첨자진(이동시) 등의 진법을 가지고 있었다. 왜군에게도 나름대로 진법이 있었다. 거북선은 그러한 왜선의 진영을 흐트러트리는 돌격선 역할을 했다고 한다. 거북선의 전면 하단에는 귀면 돌기가 있어 적의 배에 구멍을 내고, 용두에서 뿜는 불은 적선의 돛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이렇듯 거북선이 주로 적진에서 육탄전을 감행하는 까닭에, 적병이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철갑을 씌우고 쇠살을 꽂았다고 한다.



조선의 전함 : 1550년 을묘왜변 때 왜군의 대단위 습격을 받아 전라병마사가 전사하고 전라남도 땅 태반이 전란에 휩싸였다. 이 때 칼을 빼어들고 상대방의 배에 뛰어들어 공격하는 것이 장기인 왜구들을 상대하면서 개발된 배가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선체가 높은 것이 특징이었다. 마치 성루와 같았기 때문에, 해전 때 다람쥐같이 칼을 들고 배에서 배로 뛰어다니는 왜구들을 상대하는 데 적합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판옥선에 아예 철갑을 덮고 쇠살을 꽂은 것이 바로 거북선이다. 이렇듯 조선의 전선은 왜구를 소탕하는 가운데 개량되어 왔기 때문에 일본과의 해전에서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조선의 화포 : 화포는 주로 무쇠 덩어리를 발사하여 적의 배에 구멍을 내서 침몰시키는 데 쓰였다. 이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된 장군전, 차대전 등도 있었다. 이것은 화포에 끼워 쏘는 굵고 커다란 일종의 화살인데 여기에는 쇠로 된 날개가 달려있어 발사후 방향을 유지시켜 주었다. 이것이 일단 적의 배에 명중되면 화포탄보다 더 큰 구멍을 뚫어 순식간에 적선을 침몰시키는 위력을 발휘했다.


이순신의 전술 : 이순신의 해전에는 화포를 발사하면서 접근하여 배를 붙인 다음 적선에 올라 선상 격투를 벌이는 중세 해전의 전형적 형태란 없다. 따라서 왜군이 배를 육지에 대고 도망가도 그 수급(머리)을 베기 위해 육지에 내려 추격하는 법도 없었다. 이는 육박전에 능한 왜군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이순신이 취한 냉철한 태도였다. 또한 우리의 전선은 견고하지만 왜선은 가볍고 빠르다는 점을 이순신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견고하다는 것은 그만큼 무겁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꾼의 피로도 빨리 온다. 따라서 이순신은 전투에 임해서는 언제나 속전속결로 끝내는 전술을 구사했다. 적의 강점을 피하고 우리의 강점을 살리는 이순신의 탁월한 지휘역량이 수군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