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1)

from 역사이야기/정리 2008. 6. 24. 10:13
 17세기 전반에 일어났던 병자호란(인조 14년, 1636)은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전이었다. 몽고에 대한 항쟁이 40여 년간 계속되었고, 임진왜란에서는 7년간의 싸움 끝에 왜군을 격퇴한 데 반하여, 병자호란은 불과 2달만에 조선의 굴복으로 끝나고 말았다


7대한을 갚아주기 위하여

-명의 쇠퇴와 여진족의 흥기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금나라가 몽고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 후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은 명과 조선에 대하여 이중적인 종속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명대의 여진족은 건주, 해서, 야인 여진의 셋으로 갈라져 있었다. 명나라는 이 여진족에 대하여 무력과 회유의 양면정책을 취하면서 조선과 여진이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건주 여진의 누르하치가 서서히 여진족을 규합, 16세기말에 이르러 여진족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명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조공을 바치는 등 명에 대한 순종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여진이 강성해지는 반면 명의 국력은 날로 쇠퇴해 갔다. 잦은 군대 동원과 그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명의 몰락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1616년, 누르하치는 ‘대금(大金)'이란 국호로 후금을 건국한 후 명과 대항하는 정책으로 나아갔다. 1618년에는 그동안 명에게 당했던 '7대한'을 갚는다는 명분 아래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중국의 정세가 급변하였고 조선은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명분 보다는 실리를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

 1618년 심양의 군대가 패배하고 무순이 함락되자 명은 조선에 단련된 화기수(소총수) 7천을 준비해서 대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반면, 누르하치는 평안도 관찰사에게 군대를 파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은 광해군의 즉위를 도왔던 대북(북인의 한 갈래)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조선이 국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명의 후방을 수비한다는 측면에서 유익하다'고 하면서 명의 출병 요구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와주었던 일과 전통적인 대명 관계를 감안하면 원병을 파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명을 지원토록 하고 사태를 보아 후금과 강화하도록 밀지를 내렸다. 명을 도우러 떠난 강홍립은 1618년 사르후전투에서 후금군에 포위되자 그들에게 조선의 파병이 부득이했음을 설명하고 화평을 성립시켰다.

 누르하치의 목표는 요동을 확보하고 그곳을 발판으로 하여 명을 치자는 데 있었다. 따라서 북의 몽고와 남의 조선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조선의 파병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이 시기에 광해군은 후금에 대해 조선군의 파병이 본의가 아니었음을 이해시키려고 하였고 누르하치는 이를 기회로 정식적인 화평 관계를 맺어 조선의 확실한 보장을 받으려 하였다. 광해군은 이러한 후금의 의도를 간파하고 중립정책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나라를 보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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