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3)

from 역사이야기/정리 2008. 6. 24. 10:15

오랑캐를 섬길 수는 없다

-병자호란

 정묘호란이 끝난 후 후금은 승전국으로서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식량을 내어 줄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명을 정벌할 병선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후금의 태종은 내몽고를 정벌하는 한편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대하여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신하의 나라)'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조선을 '아우의 나라'에서 '신하의 나라'로 만드려는 굴욕적인 요구였다. 당시 척화파의 강경론을 대표하는 홍익한은 이렇게 상소하였다. "신은 이 세상에 태어난 후로 오직 대명천자(大明天子)가 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랑캐를 섬긴다는 말은 어찌된 일입니까?" 이 말에는 오랑캐에 대한 굴복을 용납하기 어려웠던 점이 잘 나타나 있다. 후금의 무리한 군신관계 요구로 주전론이 대두하고 조선과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되어갔다.

 후금의 태종은 인조 14년,(1636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었다. 그 후 청의 태종은 조선에 대하여 왕자대신 및 척화 주장자들을 잡아 보내지 않으면 다시 조선을 치겠다고 위협하였으나 이미 척화론이 대세를 이룬 조선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명을 정벌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같은 해 12월 1일 만주.몽고.한인의 혼성병력 10만을 이끌고 조선 침략을 재개하였다.

 일찍이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민(民)에 대한 조직을 강화하여 이를 전투력으로 전화시키기 위해 '8기(八旗)제도'를 창안하였다. 이는 300정(丁)이 1니루,5니루가 1잘란,5잘란이 1구사(기:旗)로 구성되어 있는 병민일체의 사회조직이었다. 따라서 1기는 7,500명의 군사이니 팔기군은 모두 6만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팔기군은 깃발의 색깔을 가지고 부대를 구분하였는데 황.백.청.황의 4색에 각각 테두리를 두른 것과 두르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팔기군을 주력으로 하는 여진족의 기병은 우수한 기동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안주까지 쳐들어왔다. 조선 정부는 뾰족한 방어 대책을 찾지 못한 채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놓고 피난처를 정하기에 바빴다. 12월 14일 개성 유수의 급보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통과했음이 알려지자 종묘와 비빈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뒤이어 인조도 세자와 대신들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미 청군이 경기지방까지 들어와 강화도로 가는 길이 차단되자 인조는 급히 방향을 바꾸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강화도 피난 계획을 세우고 식량과 군비를 강화도에 집중시켰었다. 그러나 급작스런 상황의 변화로 인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당시 성내의 식량으로는 두 달을 버티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식수난은 더욱 심각했다. 청군이 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조선에 불리해져 갔다. 이러던 중 체찰사 김류가 여러 장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적진 돌파의 명령을 내려 성밖으로 나간 조선군이 청군의 매복 공격으로 대파당하자 사기마저 크게 꺾이게 되었다. 전국에 근왕병을 모집하였으나 이것마저 별다른 호응이 없자 피난 조선 정부의 논의는 점차 주화론으로 기울어졌다. 이 때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인조와 조선 정부는 전의를 상실하였다. 결국 청의 요구대로 척화 강경론자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을 결박지어 청진으로 보내고 항복의 뜻을 전하였다. 항복 교섭은 조선측의 주화론자 최명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인조 15년,(19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현재의 송파구 삼전동)에서 청 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을 치루었고 청군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김상헌 등 척화파의 주요 인물들을 묶어 심양으로 돌아감으로써 병자호란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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