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4)

from 역사이야기/정리 2008. 6. 24. 10:16

우리는 대로를 따라 한성으로 직행할 것이다

-호란에서의 패전 이유

 정묘호란이 발발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채 안되는 시점이었고,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은 정묘호란 이후 9년이 지난 뒤였다. 따라서 처음 여진과의 외교 문제가 일어났을 때 가급적 전쟁은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더구나 여진의 압력은 예고없이 쳐들어온 일본의 침략과는 달리 명과의 항쟁 과정에서 후방의 근심을 없게 하려는 조선 견제책이었기 때문에 대처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전쟁을 피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광해군의 실리적인 중립외교 정책은 현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서인의 권력 장악과 그에 따른 지나친 친명정책은 후금을 자극하여 정묘호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후 호전적인 청 태종의 즉위와 굴욕적인 군신관계 요구로 양국 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병자호란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두 번의 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전쟁의 위험성이 예고되어 조선군의 훈련 정도나 병기의 질이 청군에 비하여 뒤지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주전론이 우세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조선군이 일패도지한 까닭은 무엇인가?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기병인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하여 활을 가지고 적을 격퇴하는 장병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칼과 조총으로 근접전을 벌이는 왜군에 대한 대응 방법을 강구하기 위하여 포수(총),사수(활),살수(창,칼)의 세 가지 병종으로 구성된 삼수병체제를 개발하였다. 그러나 이 삼수병 체제는 북방의 여진과 싸우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산성 중심의 방어 전략과 청야작전의 실패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양대 호란에서 조선은 제한된 병력으로 서북 국경 지대 요진을 방어하여 침공군의 수도권 진출을 지연시키려고 하였다. 조선군은 보병 중심의 소수 병력으로 기병 위주인 다수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거점 방어가 효과적이라는 판단 아래 의주의 백마산성, 황주의 정발산성, 평산의 장수산성 등을 보수하여 그 지역의 병력을 산성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이 산성에서 항거하면 우리는 대로를 따라 한성으로 직행할 것이다. 조선의 산성이 우리의 진로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말한 바대로, 청군은 조선의 산성을 무시하고 빠른 기동력으로 대로를 따라 한성으로 진출하여 조선군의 지휘체제를 마비시킴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산성 중심의 방어전략을 무력하게 만든 주원인은 청야작전(군량과 무기를 모두 산성으로 옮기고 미처 옮기지 못한 것들은 태우거나 파괴하는 것)의 실패에 있었다. 청군은 두 차례의 조선 침공에 있어서 그들의 보급품, 특히 군량 확보를 위한 사전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군이 청야작전을 철저히 실시하지 않고 다투어 산성에 들어가려고만 한다는 점을 간파한 까닭이었다. 즉 청군은 그들의 모든 보급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조선 내지에 깊숙이 대군을 이끌고 진입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 결과, 정묘호란 당시에는 의주로부터 평산에 이르는 서북 변방 각지의 막대한 관곡과 병기가 모두 후금군의 손에 들어갔다. 따라서 후금군의 진영에는 군량이 남아돌 지경이어서 그들 본국의 군량에 충당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병자호란 때에도 조선측은 끝내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