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5)

from 역사이야기/정리 2008. 6. 24. 10:17

오랑캐에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하여

-북벌론의 대두

 여진족에게 굴욕을 당함으로써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반청 감정은 수그러 들지 않았다. 병자호란에 이어서 청은 명나라마저 정복함으로써(인조 22년, 1644년) 중원의 새로운 정치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전쟁에서의 패배로 양국 간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나 조선에서는 내심으로 반청 감정이 응집되어 북벌론(청을 정벌하자는 논의)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이 북벌론은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효종으로 즉위하면서부터(1649년) 북벌계획으로 확정되어 본격화되었다.

 효종은 즉위 후에 반청 척화파 계열의 인물을 등용하고 송시열의 적극적인 보좌를 받으며 설욕을 위한 본격적인 북벌계획을 준비하였다. 북벌계획의 요점은 군비증강에 있었다. 어영청, 수어청의 부대를 강화하고 국왕의 친위군인 금군을 강화하는 등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했으나 재정난으로 전부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효종의 이러한 북벌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고, 북벌 준비로 훈련된 군대는 오히려 청이 러시아와 싸웠던 두 차례의 나선정벌(1654년, 1658년)에 동원되기만 하였다. 효종이 죽자 이 북벌론 자체도 쇠퇴하였으며 재정적인 부담만 남기고 말았다.


※도움글 - 찢은 자도 옳고 주워 붙이는 자도 옳다

 병자호란 중에 남한산성에 갖혀 있던 조선 조정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청군에게 화친을 청하는 국서를 보내기로 했다. 주화파 최명길이 그 국서를 쓰는데 척화파인 김상헌이 달려와서 그것을 찢어 팽개치며 울분을 토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최명길이 태연하게 김상헌이 찢어버린 국서를 주워 모아서 풀로 붙였고 청과의 강화가 성립되었다.

 그후 사람들은 ‘찢은 자도 옳고 줏은 자도 옳다(裂之者可 拾之者可)’라고 하며 양시론(兩是論)으로 두 사람의 참뜻을 새겼다고 한다. 이것만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식의 흑백논리가 판을 치는 요즈음에 한 번쯤 새겨볼 만한 이야기이다.

※도움글 - 누르하치가 내세운 7대한

출처 -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7&eid=baPEGA+ItPv9SlMWUp/+HEVTmSqoFlsk&ts=1090565798

1)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이 명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뮤 이유 없이 명 정부가 그들을 죽였다.
2)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는 과정에 명이 여허(Yehe 葉赫)부족의 편을 들었다.
3) 후금은 명의 변방 장군과의 약속에 의하여 국경을 넘어온 사람을 죽였는데, 오히려 명 조정이 이에 대하여 후금에게 책임을 묻고 후금의 사절을 죽였다.
4) 여허 부족이 공주를 누르하치에게 보내기로 했는데, 명의 관리가 공주를 납치하여 명과 우호관계에 있는 몽고에게 주었다.
5) 후금이 자하(紫河), 삼차아(三岔兒), 무안(撫安) 등지를 개간하려 하자 명이 여진족을 쫓아냈다.
6) 명은 여허와 후금의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계속해서 여허에게 후금을 중상모략했다.
7) 명은 후금과 여러 부족들과의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특히 여허에게 의심과 증오감을 갖도록 조장하고 명과 여허부족이 함께 후금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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