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글이 어지러운 것은 『열하일기』때문이다
- 박지원의 혁신적인 한문소설

 연암 박지원은 뛰어난 학자요, 천부적인 문장가였다. 그는 일찍이 경서와 역사서를 통독하고 천문 지리와 병법, 농업, 경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공부로 19세 때 벌써 학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박지원의 일생에 일대 전기가 된 것은 사신의 수행원으로 청에 다녀온 후였다. 그의 『열하일기』(정조 4년, 1780년)도 이 때 쓴 기행문이었다.
 박지원의 작품들은 그 표현이 지극히 섬세하고 또 재치와 익살을 교묘하게 구사하였기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폭발시켰다. 그의 한문학은 중국의 전형을 탈피한 이른바 한국적인 한문체를 확립하였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박 지원의 작품이 단지 새로운 문체로서만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열하일기』에 수록되어 있는 『허생전』을 한 번 보자. 돈벌이에 나선 허생이 당시 큰 부자였던 변씨를 찾아가 돈 만 냥을 빌렸다. 그리고 전국의 과실을 몽땅 사들여 값이 10배로 오른 후 되팔아 그 돈으로 농기구와 옷가지를 사들인다. 그것을 가지고 제주도에 가서 팔고 다시 그 돈으로 제주도의 말총(말꼬리, 갓 등을 만드는 원료가 됨)을 모두 사는 방법으로 수십 배의 이익을 보았다. 그 후 변산 땅에서 출몰하던 도적 2천여 명을 모아서 각각 돈 백 냥과 소 한 마리씩을 주어서 무인도를 개척하고 거기에 정착하게 한다. 때마침 일본 나가사끼에 큰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곡식을 싣고 가서 팔아 은 백만 냥을 벌어와 변부자에게 돈을 갚는다는 줄거리이다.
 이는 곧 당시 집권층 성리학자들의 정치적 무능을 통박하는 것이며 실학자 박지원이 구상한 부국강병책을 소설로 나타낸 것이다.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서 사회 개조를 위한 이상과 실천 가능한 방법을 예시했던 것이다.
 양 반 계층을 신랄하게 풍자한 『양반전』도 빼놓을 수 없다. 환곡을 1천 석이나 얻어먹고 갚지 못해 투옥될 지경에 몰린 양반이 그 고을 사또의 주선으로 자신의 양반 신분을 팔기로 했다. 한 돈 많은 상놈이 양반 신분을 사서 한동안 양반으로 행세하였다. 그러나 체면을 위해서 굶어도 배부른 척 해야 하고, 추워도 화롯불을 가까이하지 않는 그런 양반 노릇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양반’이란 신분 자체를 내던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양반전』은 양반층의 무능과 무위도식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다. 양반 상놈의 구분에 억매여 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이야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박지원의 소설은 형식과 내용의 양면에서 혁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고정관념을 깨는 새로운 문체, 웃음과 재치, 나아가 사회 개혁의 방향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 나라 근대정신의 토대가 되었다.


박지원의 필화(筆花) 사건

 박지원의 파격적인 문체는 정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그 때문에 일종의 필화(발표한 글이 말썽이 되어 화를 입는 것)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은 정조는 “요새 문장이 기이하고 희롱됨은 모두 박지원의 『열하일기』 때문이다. 만일 박지원이 바른 글을 지어서 『열하일기』의 죄를 씻지 않으면 큰 벌을 내리겠다.”고 한 것이다. 왕명이 하도 엄하여 박지원이 속죄의 뜻으로 글을 썼는데 그것이 또 명문장 중의 명문장이라 정조도 감탄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흥부전』에 나타나 조선 후기 농민들의 생활

『흥부전』을 보면 흥부 내외가 온갖 품팔이에 나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매기’, ‘밤짐 지기’, ‘담쌓는 데 자갈 줍기’, ‘오뉴월 밭매기’, ‘구시월 김장하기’, ‘삼 삶기’, ‘채소밭에 오줌 주기’, ‘못자리내 망초 뜯기’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그날그날 품을 팔아 살아가는 농민들의 고달픈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조선후기 지주 전호제의 확대와 농민층 분해로 소작지조차도 얻지 못하게 된 농민들이 대부분 임노동자로 전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문학 작품은 그 시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 주기도 하고, 그 시대 사람들의 감정과 풍습, 희망과 소원을 담고 있어 역사 이해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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