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1)

from 역사이야기/정리 2008. 6. 24. 10:31

 조선 후기에는 극히 일부의 지주가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대다수의 농민들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농업기술이 발전하고 한 사람이 맡을 수 있는 경작 면적이 크게 늘어나자 점차 소작지마저도 얻기가 어려워졌다. 여기에 군수와 아전들의 횡포는 농민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농민들은 이듬해 심을 종자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식량까지 빼앗기기 일쑤였다.

 이러한 때 당시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새로운 반성이 일어났다. 이 시기는 성리학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때였다. 성리학에서의 우주와 인간을 탐구하는 철학도 중요하고 삼강과 오륜을 펼치는 예학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로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당시의 현실을 이겨 나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와 같은 생각이 실학자와 실학을 낳게 했다.

 실학자들의 연구는 사회 모든 부문에 걸쳐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학자들의 연구를 있게 한 배경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의 흐름으로 갈라진다. 하나는 농업을 중요시하는 중농적 실학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상공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적 실학사상이다.


토지는 농민에게

─ 중농적 실학사상 ─

 중농적 실학자들은 사회 개혁의 핵심이 토지 문제에 있다고 보았다. 이에 속하는 학자들로서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개혁 이론은 '땅은 농민에게 주어야 한다'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이들은 일하지도 않는 양반 지주들이 단지 땅을 빌려준 대가로 수확의 절반을 거두어 가고서는,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줌으로써 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그 위에 조세제도,군사제도의 기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중농적 실학자들의 개혁 방안은 토지제도 개혁론이 그 핵심이 되고 있다.

 유형원은 토지 문제 해결 방안으로 ‘균전제’를 주장하였다. 균전제는 원래 집집마다 균등하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제도인데 유형원은 사농공상에 따라 차등있게 토지를 나누어 주자고 하여 성리학적인 신분 관념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익은 균전제를 시행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어, 실현 가능한 방안으로서의 한전제를 주장하였다. 그는 균전제를 시행했을 경우 한 집 마다 돌아가는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하고 현재 영업전 보다 많은 토지를 가진 사람은 팔수만 있고 영업전 보다 적은 토지를 가진 사람은 살 수만 있도록 하여, 현실 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되 장기적으로는 균전제를 시행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으로서 이 한전제를 주장하였다.

 토지제도 개혁론은 정약용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젊은 시절 자신의 문제 의식이 잘 드러나 있는 ‘전론(田論)’에서 그는 ‘여전제’를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균전제의 경우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토지를 받게 되어 지주 소작이 다시 생겨날 소지가 있고, 한전제의 경우 남의 이름을 빌어서 사고 파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고 하면서 마을 단위로 공동농장을 만들어 누구나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일한 만큼 노동량에 따라 수확물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평소 ‘일하지 않는 놈은 먹지도 마라’는 그의 철학이 바탕이 된 것으로 양반 조차도 수확물을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혁신적인 제도였다. 그러나 이같은 급진적인 여전제가 현실적으로 시행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정약용은 그의 말년에 보다 실현 가능한 방안으로서 정전제를 내놓았다. 본래 정전제는 중국 주나라에서 실시된 제도였다. 주나라 정전제의 내용은 이렇다. 일단 일정한 면적을 가진 정사각형 모양의 땅을 우물 정(井)자로 나눈다. 그러면 모두 아홉 구역의 땅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여덟 명의 농부에게 각각 주변의 한 구역씩 나누어 준다. 나머지 중앙의 한 구역은 여덟 명의 농부가 같이 농사를 지어 나라에 세금으로 바친다. 이런 내용을 가진 주나라의 정전제는 비탈이 많고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의 실정에는 잘 맞지 않았다. 이에 정약용은 주나라의 토지제도를 보완하여 우리 실정에 맞도록 한 정전제를 구상하였다. 그는 정전제의 원리를 살려 산기슭이나 비탈진 곳에 있는 조각 땅은 서로 보태어 넓이를 기준으로 구역을 나누자는 주장을 폈다. 또한 현실적으로 정전제를 한꺼번에 실시할 수 없으므로, 국가가 장기적으로 지주로부터 땅을 사들여 정전을 설치하고 아직 사들이지 못한 땅에서는 소작지만이라도 균등하게 분배하여 토지 소유의 평등을 이루자고 주장하였다. 지주전호제의 개혁과 함께 농민층 분화로 인한 사회 혼란을 막아 보자는 주장인 셈이다.

 중농적 실학자들은 일찍이 중앙의 권력으로부터 밀려나 농촌에 정착한 남인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어두운 농촌의 현실과 농민생활의 어려움을 직접 보고 듣는 가운데 자신들의 학문을 이루어 나갔다. 적당히 세금을 줄여주는 방법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농민에 대한 애착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들의 학문하는 태도는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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