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from 역사이야기/정리 2008. 6. 24. 10:37

 한글의 창제는 문자의 독립을 이룩한, 민족문화상에 가장 빛나는 업적이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한자를 사용하였으나 말과 글이 달라 의사소통이 어려웠고 배우기도 쉽지 않아 문자 생활에 많은 불편을 겪어왔다. 향찰이나 이두, 구결 등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우리말을 정확히 기록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고유문자를 창제한다는 것이 긴급한 사회적 요구가 된 것이다.

 세종 25년(1443년)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한글을 창제하고 세종 28년(1446년)에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세종은 이 책의 서문에서 백성들이 자기 생각을 쉽게 적을 수 있는 문자가 있어야 한다고 그 창제 동기를 밝히고 있다. 한글은 세계 문자 가운데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인 표음문자(자모문자)로 17자의 자음과 11자의 모음으로 모두 28자로 구성되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 어리석은 사람은 열흘에 깨치는 글

 한글은 우리말을 적는 데 필요한 소리를 정밀하게 표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한글을 만드는 작업에 참가한 정인지는 한글을 "바람 소리와 학 울음,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도 모두 적을 수 있는" 문자라고 했다. 또한 소리를 내는 사람의 기관을 본떠 문자의 모양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쉬웠다. 따라서 배우기도 대단히 쉬웠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 만에 깨칠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었던" 것이 한글이었다.

 한글의 과학성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나라의 문자에 비하여 뒤늦게 만들어졌다는 데에서도 연유한다. 다른 나라의 문자들이 대부분 고대에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반면, 우리나라의 한글은 중세에 이르러 필요에 의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 모음이 쉽게 구별될 뿐 아니라 자음이 입술, 입, 혀의 위치를 확실하게 해주며, 자·모음이 수직·수평의 조합을 통해 사각형을 이루면서 정연하게 배열된다. 이러한 점에서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서민들 사이에 널리 쓰인 한글

 한글의 창제, 반포에는 반대도 많았다. 세종 26년(1444년)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등 반발이 컸다. 한글이 제정(1443년)되고 그 반포(1446년)가 미루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최만리는 새 문자를 만드는 일 자체가 오랑캐의 짓이라고 반대하였다. 이는 유학과 한문학을 숭상하는 문화적 사대주의의 소산이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한글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이를 활용하는 데 힘을 썼다. 최초로 편찬된 한글 서적은 [용비어천가]인데 125장의 악장체로 조선 건국의 연원과 위업을 찬양하였다. 불경을 번역한 [석보상절]은 소현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엮은 것이었다. 이를 보고 감탄한 세종이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이 두 책을 하나로 합친 것이 [월인석보]였다. [동국정운]은 한자음을 한글로 표기한 것이며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도 한글로 편찬되었다.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삼강행실도]와 같은 책들이 한글로 편찬되기도 하였다.

 세조는 '간경도감(불경 간행을 위한 임시기구)’을 설치하고 많은 불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한글은 부녀자들의 편지에 널리 쓰이기도 하였다. ‘암클’이라는 호칭도 이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 그 외에도 농민이 보는 농서와 대외적 비밀 유지가 필요한 병서 등이 한글로 쓰였다.


통치의 수단에서 저항의 무기로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의

 [훈민정음] 서문에 명기된 바대로 한글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창제되었다. 이는 세종의 애민정신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 통치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 같은 목적은 백성들을 직접 상대하는 서리들에게 한글 시험을 치르게 한 데서 잘 나타난다. 또한 [삼강행실도]같은 책을 한글로 편찬하여 백성들에게 보급하고, 그들을 유교적으로 교화함으로써 성리학적 통치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렇듯 창제 초기에 한글은'통치의 수단'으로서 크게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글을 쉽게 익히고 사용함으로써 백성들은 점차로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글의 역할은'통치의 수단'에서 '저항의 무기'로 바뀌게 되었다. 허균의 [홍길동전]의 저술과 유포, 잦은 괘서, 벽서 사건은 이의 반증이다. 연산군 때 탐관오리의 횡포를 고발하는 벽서가 나붙자, 한글 책을 불사르고 한글의 사용을 금지시켰던 사건만 보더라도 한글이 서민 의식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시점에서 한글 창제의 의의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토록 어렵다는 미적분에 대한 설명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것을 상상해 보라. 문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산 경험과 지식들을 축적하는 유력한 도구가 된다. 가장 과학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배우기 쉬운 한글은 지식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민족문화 발달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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