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선단, 세계 무역의 한 축을 담당

-해상 실크로드를 누빈 신라인

 당시 장보고 선단은 세계 무역 질서의 한 축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장보고 선단이 멀리 아랍까지 연결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화려한 꽃문양 무늬가 장식된 화문빗은 바로 아랍산 거북 등껍질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난 1961년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 다라니경이 발견된 불국사 석가탑, 이 때 함께 발견된 유향 역시 아랍 물산으로 확인되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라와 아랍 사이에는 교역품이 오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장보고 선단과 아랍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집트는 고대 아랍 문명의 상징이다. 이집트의 국립도서관, 이곳에는 매우 흥미로운 서적 한 권이 보관되어 있다. 이브쿠르드지바가 쓴 '제 도로와 제 왕국지'라는 기행문에는 '신라'라는 나라 이름이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신라에 대한 묘사와 아울러 명주, 비단, 녹향, 노회(알로에), 말안장, 호랑이 껍질, 도기, 고라이브(인삼) 등 신라로부터 들여오는 물품의 목록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기행문에는 신라의 지도까지 표기되어 있다. 이 시대에 이미 이집트는 신라의 존재를 알았던 것이다.

 이런 기행문이 나온 시대는 바로 해상 실크로드시대, 육로를 통한 실크로드 대신 발달한 항해술을 바탕으로 해상 실크로드가 각광받던 시대였다. 바로 장보고 시대였다. 아프리카, 아랍을 출발한 해상 실크로드는 인도양을 거쳐 중국 양주 등에서 청해진의 장보고 선단이 있는 곳까지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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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기착지인 양주, 이곳의 당성박물관에는 신라인 최치원관이 마련되어 있다. 최치원의 저술 계원필경에는 당시 교역품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인삼, 천마를 비롯한 약재, 금은동 공예품 금은장 벼루갑과 벼루대, 은연적, 금동가위, 각종 비단, 칠기, 고급 인장, 은수저 등등. 이것들은 대부분 귀족과 왕족들이 사용하던 고급 수공예품들이었다.

 "문화해상 실크로드를 남해로라고 부르는데 남해로를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연결시키는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 장보고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였습니다." (강봉룡교수 :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당시 아랍과 신라의 교류 흔적은 경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괘릉에는 서역인상이 무덤의 수호신으로 서있다. 이들 아랍인들이 아무런 거부감없이 신라 사회에 편입될 정도로 교류가 활발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렇다면 장보고 선단의 무역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

 일본 황실의 유물 보관소인 정창원, 이 정창원 도록에는 당시 교역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당시 장보고 선단이 취급했던 물품은 일본에서는 이들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미리 구입 신청서를 작성해야 했다. 그만큼 장보고 선단의 물품이 일본에서는 가치가 높았던 것이다. 일본 길고에 따르면 장보고 선단 물품 구입에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신라인 장보고가 작년 12월 말안장 등을 바쳤는데, 그들이 가지고 온 물건은 민간에 맠겨 교역할 수 있게 하라. 다만 백성들로 하여금 값을 어기고 다투어 가산을 기울이지 않도록 하라"(속 일본후기 841년 2월 무진조)

 "자기 집안의 모든 가산을 탕진해서 장보고가 가져온 물건들을 경쟁적으로 구매하려고 해서 장보고의 물건이 가격이 폭등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가산이 탕진되는 그러한 사회적 문제까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그러한 가격의 폭등을 방지하기 위한 통제, 개입을 하기도 합니다만 그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죠."(강봉룡교수 :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이러한 장보고 선단의 무역 규모를 짐작케 하는 기록이 있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신분에 따라 물품의 구입을 제한하고 있는데 일본은 장보고 선단의 물건을 사기 위해 목면 7만둔(屯)을 지급하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될까?

 "면 7만둔 정도를 지급했다고 했는데 이것을 당시 일본측의 곡가로 환산했을 경우에 한 2만6천석 정도의 곡가로 환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1석=80kg이 20만원 정도 되니까 52억 정도의 규모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박남수 연구관 : 국사편찬위원회)

 이러한 장보고 선단의 활약은 당시 일본 신분제사회의 기반마저 흔들었다. 장보고 선단과의 무역으로 경제력을 쌓은 신흥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야타마로 역시 그런 인물 중의 하나였는데 이로 인해 중앙 귀족들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일본 중앙 귀족들은 신라 상인들이 내항하면 선금을 주고 물건을 대량구입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 물건을 구입할까 서로 경쟁하는 일이 820-830년대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이성시교수 : 와세다대학)

 이 시기 일본은 장보고를 보배 보자에 높을 고자로 표기하고 있다. 장보고 선단의 위상과 영향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1200여 년 전, 우수한 신라선과 탁월한 항해술, 그리고 대양을 거첨없이 건넜던 항법을 가졌던 장보고 선단, 그들은 동아시아를 넘어 해상 실크로드의 주역이었다. 한반도 서남해안의 장도를 거점으로 했던 장보고 선단,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해상 무역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 이 글은 KBS 역사스페셜(2005.11.18) "장보고선단 대양 항해 어떻게 가능했나?"
    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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