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요산제(樂山齊)의 좁고 어두운 방에서
사과 궤짝으로 만든 책상 위에서
하루 10시간씩 원고를 쓴 임종국.

"영광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니다.
 3·1의 함성이 무성한 여름이라면
 친일은 참담한 동면이다.
 동면기를 모르고 건국이라는
 맹아기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친일은 결코 은폐의 대상일 수 없을 것이다."
 -[일제 침략과 친일파] 서문에서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민족사를 가장 크게
 그르친 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제 2의 매국, 반민법을 폐기한 것도 친일파였다.
 한말(韓末)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제 1의 매국을 했고
 총독부에 영합하면서 친일을 했다.
 해방 후에도 개과천선은 커녕 반민법을 폐기하면서,
 독재와 부패 끝에 5·16을 불러들였다."
 -[제 2의 매국, 반민법의 폐기]에서

평생을 친일 문제 연구에 바쳐온 재야 사학자,
1989년 11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빈소에서는 유명 인사의 화환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루어 낸 일에 비하면 신문에
제대로 된 부음기사 하나 실리지 않았다.
그는 저명 인사도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한국 주류 사회에서 결코 환영받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친일문학론]은 친일문학에 대해 낱낱히 파헤친 최초의 실증적 연구로
1965년 한일회담에 대한 경고장으로 세상에 나왔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1965년 6월 22일)

임종국의 나이 서른 일곱이던 1965년,
14년간 끌어오던 한일회담이 막바지에 이르고,
해방 20년 만에 다시 한일간의 국교가 정상화된 것이다.

그러나 굴욕적인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과거 청산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국교를 맺는 것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친일세력이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힘을 합쳐서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킨 강화도 조약의 재판이라는 것이었다.

임종국 또한 이것을 제 2의 망국의 길이라 보았다.
그는 20년 전 해방될 때의 경험을 떠올린다.

"8·15를, 17살 때 해방을 맞았는데
 중학교 강당을 빌려가지고 일본 군대들이
 한 10일 정도 있다가 간 기억이 있습니다.
 하루는 상등병 하나가 내게 묻더군요.
 '자네 어떻게 생각하느냐?',
 '조선이 독립되게 돼서 좋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군인이 잡아 먹을 거 같은 표정으로 노려보더군요.
 한참 쳐다보면서 생각을 하더니,
 '20년 후에 만나자.'
 그렇게 얘기하면서 끝났거든요.
 하도 상대방이 노려보는 눈이 무서워서
 인상에 박혔던 건데 그러고선 잊어버리고 있었죠.
 1965년이 되니깐 한일회담을 한다고 야단이예요.
 한일회담을 하는 걸 보니깐
 그 전에 20년 후에 만나자고 하던 게 생각이 나더군요."
 -[임종국 육성/1988년 8월 임헌영과의 대담]에서

"그 놈들은 1개 병사들조차도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신념을 갖고 사는데,
 우리 장관이란 사람은
 '제 2의 이완용이가 되더라도'라는
 타령을 하는 판이다.
 이완용이 될지언정,
 한일회담을 타결하겠다면
 그건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한일회담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에서 나는 '친일문학론'을 쓰기로 작정했다."
 -[친일문학론]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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