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런 한일회담을 바라보며 울분을 느끼며
단숨에 써내려간 책이 [친일문학론]이다.
2천 매 쓰는데 8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1966년, [친일문학론]이 발간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 현대사를 이끌어 온 지도 세력들의
치부를 건드리며 도전장을 내민다.
친일문학론은 일제시대 친일 인물들과 친일 단체들의 행적을 낱낱히 밝히고
역사 앞에그들의 반민족 행위를 고발하고 있었다.

김동인, 김동환, 김소운, 김안서, 노천명, 모윤숙
백철, 유진오, 이광수, 이효석, 정비석.

그 중에는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를 닦은 유진오같은 인물도 있었고
이효석, 정비석 처럼 낯익은 소설가들도 있었으므로
그들이 친일파였다고 선언하는 것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낳는 일이었다.
또한 임종국 자신으로서는 문제의 인물로 낙인 찍히는 일이었다.

1,500부가 찍혔으나 그 해 다가도록 500권 미처 안팔렸다.
어떻게 알려졌는지 모르지만 이 책이 일본에 알려져
1,000권 대부분이 조금씩 일본으로 팔려 나갔다.
임종국, 그의 책 [친일문학론]의 가치를 먼저 알아본 것은 일본이었다.
1976년 친일문학론은 일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친일문학론]을 번역한 와세다 대학의 오오무라 마쓰오 교수는
이 책이 감정적으로 쓰인 인신 공격이 아님을 강조했다.

"친일문학자들을 하나도 규탄하고 있지 않습니다.
 공격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만을 이야기합니다.
 사실로써 독자들을 설득하는 형식입니다.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고, 어떤 의미에서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료집 같은 것입니다.
 자료를 가지고 말하는 방법이 문학자로서도
 역사학자로서도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오무라 마쓰오]

그는 사실적이면서도 매우 실증적인 임종국의 서술 태도에 감탄했다.
이후 학자로서 평생을 교류하게 된다.
오오무라 교수는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자료들을 구해
임종국 선생에게 보내주었다.

임종국은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으나 도봉구 창동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임문호는 1930년대 천도교 청년당 당수로 활동하던 종교 지도자로
창동 일대에 9만8천여 평의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농촌 운동과 자활학교를 꿈꾸던 사람이었다.
임종국의 가족들은 남의 땅을 밟고 다니지 않았다.

임종국은 음악적 재능이 풍부한 청년이었다.
구하기 어려운 악보를 직접 손으로 베껴 보관하기도 했고,
키타와 아코디언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음악가의 길을 꿈꾸던 감수성 풍부한 청년 임종국은
아버지의 기대로 1952년 고려대 정외과 입학한다.
한 때 고시공부에 매달리기도 했으나
후일 그는 전쟁 직후 혼란 속에서 개인의 성공에
집착했던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 하기도 했다.

"한 많은 피난살이 속에서
 그런 울분과 충격도 낡은 앨범처럼 퇴색해 가고,
 땃벌떼다 정치파동이다, 휴전회담이다로
 어수선한 세월이 흘렀다.
 폐허에서 하루의 삶에 쫓기던 나는
 판사 검사가 돼서
 떵떵거리고 살아야겠다는 엉뚱한 꿈에 사로잡혔다."
 -[내 필생의 작업-제2의 매국 반민법 폐기]중에서

그러던 그는 당시 고려대 국문과 교수였던 조지훈 선생을 만난다.
그때부터 그는 고시 공부를 접고 문학도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시(詩)로 등단했지만 평론에서 두각을 보였다.
학생 시절 그는 이미 소설가 이상에 대한 평론으로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1956년 3권에 걸친 [이상전집]을 내기에 이르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이상에 대한 연구는 시작도 안되었던 때였다.
이상의 자당이 살아 있던 때에 이상에 대한 당시의 모든 자료를 수합한
그의 연구는 오늘날까지도 이상 연구의 표준이 되고 있다.

그는 한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던 시대와 역사, 그리고 그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동시에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시대가 작가를 통해 어떻게 작품에 반영되었는지
역사와 시대를 작품과 연관시켜 해석하는
이른바 문학사회학적 접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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