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그에게 65년 한일회담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 이후에 생겨날 제 2의 이완용, 제 2의 송병준에 대한
경고장으로 나온 것이 바로 [친일문학론]이었다.

"독자들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할 것은
 이 책을 쓴 임종국이는 친일을 안했을까.
 이것은 아닐까한다.
 이 의문을 풀어드리기 위해
 필자는 자화상을 그려야겠다.
 이 때 내 나이 17세. 하루는 친구놈한테서
 김구선생님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 김구 선생이라는 이가 중국 사람이래!'
 '그래? 중국 사람이 뭘하러 조선엘 오지?'
 '임마 것두 몰라! 정치하러 온대.'
 '정치? 그럼 우린 중국한테 멕히니?'
 그 무렵의 내 정신연령이 몇 살쯤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도 회의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일문학론] 서문, '자화상'

그렇게 친일문학론은 역사에 대한 자각과 자기반성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친일문학론은 단순한 고발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 앞에 자기 성찰과 자기 반성을 촉구하는 살아있는 기록이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 반성은 곧 자기 아버지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천도교 당수로서 전국을 순회공연하며 내선일체를 강연했던
아버지 임문호의 행적을 세상에 공개했다.

"임문호(임종국 아버지)는, 37년 9월 4일-27일 백동빈, 임문호, 김병제로써 금산, 회령, 함흥 외 35개처를 순회강연케 하는 한편, <비타산적으로 내선일체의 정신을 발휘하고 거국일치의 백력을 고양하자>는 등의 삐라를 발행케 했던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누구는 쓰고 누구는 안쓰고 근거가 확실한 것을 내 아버지라고 해서 뺀다면 다른 사람들 것도 안써야 할 것이다. 임종국의 아버지 임문호도 거기에 대해서 일절 말이 없었고 괘씸하다는 내색을 한 적도 없었다.

아버지를 이은 다음 대상은 스승이었다.

그는 은사 유진오의 친일 행적을 밝히는 한편, 아버지의 사랑방에 드나들던 백철, 조용만, 조연현 등 내놓라하는 문학계 인사들까지 역사 앞에 반성해야 할 인물로 지목했다. 혈연, 지연, 학연을 넘어서 오로지 역사 앞에 정직하고자 했던 것이다.

친일문학론이 나왔던 60년대 중반은 친일 문제 자체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던 시대였다.

창씨명 다카기 마사오, 일본 육사 57기생이자 만주 군관학교 2기생인 박정희가 쿠테타로 민선정부를 뒤엎고 권을 장악한 때였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함께 친일 세력들이 고위 관리와 함께 문화계 주요 인사로 등장했던 그 때 친일문학론의 출간은 그들에게 심각한 도전이었다. 스승인 조지훈 선생도 제자의 신변을 걱정했을 정도였다.

"내가 이것을 쓰면 문단에서 처세하기 불리할테니,
 제자를 아끼는 마음에 말려야 하는데,
 민족정기를 생각하면 말릴 일도 아니고...
 아마 스승의 마음이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술과 바꾼 법률책]중에서

친일문학론은 주요신문에 5단짜리 광고를 내면서 등장했다.
그것은 친일 세력들에게 던져진 도전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친일문학론이 도매상이라면 우리 평론가들은 거기서 물건을 가져다 파는 소매상에 불과했다."
 -[임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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