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나온 친일문학론은 비뚤어진 현대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역사란 자기 자신을 거울에 바춰보는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은 친일 세력을 그대로 기용했다.
그들이 일제에도 충성을 바쳤다면 미군정에도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승만 정권 10년은 친일파들이 요직을 장악해 나가는 발판이 되었다.

"이승만 정부 때 장관이 115명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2부 이상을 역임한 사람은 빼야겠죠.
 16명이 빠져요. 그러면 96명이 남게 되죠.
 제가 친일파 관계를 샅샅이 조사를 하지 못했어요.
 제가 조사한 범위 안에서 33명, 즉 34%가 친일 경력이 발견이 되요.
 해외 망명을 했다. 독립투사 출신이다. 4명밖에 안되요.
 불과 4프로, 5프로 미만인데 친일세력은 34프로 훨씬 압도적으로 많아요.
 그런 상황에서 거기서부터 민족사회의 근본이 빗나가기 시작했죠."
 -[임종국 육성/1988년 8월 임헌영과의 대담]에서

이미 정부 관료의 상당수를 친일파가 차지한 가운데
제헌국회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처단을 위한 특별법안을 심의 상정했다.
여론에 밀려 뒤늦게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한달 뒤인 48년 9월 22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특위는 본격적으로 친일파에 대한 제보를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친일파 검거가 시작되었다.
그 첫번째 대상은 비행기 공장을 세워 일제의 침략 전쟁에 기여한
화신백화점 소유주 박흥식이었다.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을 비롯해서 소설가 이광수도 체포되었다.
그러던 1949년 4월, 특별법 제정을 주도한 소장파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일 세력들이 주된 역할을 하는 반공 대회는 기승을 부렸고
반민특위는 빨갱이 세력으로 몰렸다.
결국, 1949년 9월 5일, 한 장의 기념 사진을 마지막으로 반민특위는 해체되었다.
모든 문서는 친일 경찰의 손으로 넘어갔다.

"민족정기라는 것을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거든요.
 거기서 어떤 문제가 파생하느냐,
 우리 자신이 친일파와 마찬가지 인물이 되어버렸어요.
 자손들한테 민족정기다 애국해라 무슨 얼굴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겠어요.
 친일파를 처벌하지도 못했고, 그 사람들이 날뛰는 꼴을 그대로 봐왔고,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그 세대로서
 대한민국 전체가 그런 식으로 되어버렸다는 것, 그게 큰 문제예요.
 후세에 대해서 민족정기를 증명하지 못했다는 거
 이건 앞으로도 그 구정물이 100년이 지나서 가셔질지 50년 지나서 가셔질지
 아니면 200년 지나야 가셔질지 알 수 없는 상태 그거 생각하면 한심할 때가 많죠."
-[임종국 육성/1988년 8월 임헌영과의 대담]에서

그렇게 일제 청산은 실패했다.
친일 세력들은 발빠르게 미군정을 등에 업고 친미파가 되었고
반공을 내걸며 민족 세력으로 둔갑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이들은 주류 세력을 이루어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역사를 거듭해 60년대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이들은 독재의 핵심세력을 이루며 분단을 독재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친일파들은 우리 현대사 매 시기마다
스스로 사회 특권층이 되어 지도급 인사로 행세해왔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과거 친일 행적을 밝히는 연구는 금기의 영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용기있게 뛰어든 사람이 임종국이었다.
1988년 그는 한 일간지(한국일보)에 시론으로 가미가제 특공대
마쓰이 오장의 전사를 예찬했던 한 시인의 행적을 비판하고 나선다.
그 시인은 다름 아닌 서정주였다.
시인 서정주는 일제 식민지 막바지인 1944년,
가미가제 특공대를 예찬하는 마쓰이 오장 송가 를 발표한다.

"마쓰이 오장 송가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경기도 개성사람
 ......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다
 우리의 육군 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 강산이여
 한결 더 짙푸루른 우리의 하늘이여"

임종국이 문제 삼은 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가 분노한 것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성은 커녕 변신을 거듭하며
불의와 결탁하는 친일파들의 모습이었다.
일제시대 가미가제 특공대를 예찬하던 서정주는
5공화국 때는 전두환 대통령 56세 생일을 맞아
그를 찬양하는 축시를 보낸다.

"처음으로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

한강을 넓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
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 오시나이다."

그러고도 서정주는 결코 역사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친일을 처벌하지 못하는 역사를 오히려 농단했다.

그는 이렇게 변명했다.


"종천순일파?

.....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는 이의가 있다.

......

나는 이 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라면
'종천순일파(從千順日派)'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

따라서 자신은 친일파가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른 종천순일파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반민족 행위를 반성하지 않는 지식인들,
80년대까지만 해도 그들의 친일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중앙대 노동은 교수가 민족 음악가로 알려진 홍난파의 친일 행적을 발견했을 때
그에겐 다양한 경로로 압력이 들어왔다.[한국 민족음악 현단계]
이런 저런 압력과 나중에는 빨갱이로 몰리기도 하였다.
이런 식의 위협은 임종국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일제 청산에 성공하지 못했던 우리 역사,
이에 무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숱한 압력을 감수하며 그는 본격적으로 친일 연구에 돌입한다.
일제시대 자료가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던 고려대 도서관 근처에 하숙집을 잡았다.
그리고 서고 한 켠에 아예 지정석 하나를 정했다.

"고려대 도서관에 가서 엣날 책을, 잡지 같은 것을 뒤지는데 먼지가 퀘퀘 앉아 있어요.
 해방되고 난 다음에 20년 동안 아무도 들여다 보지 않았나 보더군요.
 그런데 나같은 사람이 하나 있더군요. 맨날 옛날책을 뒤지고 있어요.
 저 친구 누군가 해서 얼굴을 알게 돼서 서로 인사를 하게 되고,
 나중에 알고 보니깐 김윤식씨더군요."
-[임종국 육성/1988년 8월 임헌영과의 대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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