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국의 연구 방법은 철저히 실증하고 고증하는 방법이었다.
어두운 과거를 추적하는 일이니만큼 그 자료들이 더욱 정확하고 꼼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남선, 노천명이 어떻게 학도병 자원을 독려했는지,
이광수가 언제 창씨개명의 취지를 선전했는지,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 나갔다.
그 때 그가 모은 자료들은 현재 민족문제 연구소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 대부분의 자료들은 손으로 직접 베껴썼다.
그리고 누가 언제 무엇을 했는지 6하원칙에 따라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친일파 연구를 위해 그는 일제 시대 신문을 비롯해서 정부 기록, 재판 기록,
하다 못해 면사무소 인사 발령까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연도, 개인, 단체별로 정리해 나갔다.
그렇게 10년 간 자료를 모아 80년대 들어서는
거의 1년에 한 권 꼴로 친일파 관련 책을 써냈다.
아무도 가려 하지 않던 길, 그는 홀로 그 길을 갔다.

그렇게 축적된 임종국의 연구는 지난 93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사람들 가운데
친일파를 가려내는 데 귀중한 자료로 쓰였다.
그 때 친일 행적이 드러난 사람 중에는 부통령 또는 국회의원을 지낸 정계 인사,
그리고 문화계 저명 인사들도 있었다.
친일파가 독립 유공자로 기록되고 포상받는 현실,
그는 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첫걸음이 바로 친일파 청산이라 보았던 것이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후세로 이어지면서 더 큰 왜곡과 혼란을 낳고 있다.
2003년 5월 29일 경남 마산에서 열린 조두남 기념관 개관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곡 선구자의 작곡자 조두남의 친일 의혹이 불거져 나오면서
몇몇 시민 단체가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올바른 역사 인식 없이 시작한 기념관은 굳게 문이 잠겨 있다.
누가 나에게 졸을 던질 것인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를 기념하라고 하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도덕적인 가치 또는
사회 정의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아닌가.
청산되어야 할 역사를 소중한 역사인 양 기념하는 것은
그 잘못된 역사를 오늘, 그리고 미래에 다시 되풀이하는
것이라는 게 임종국의 생각이었다.

친일 문제를 그냥 덮고 가자는 세력과 잘못은 반성해야 한다는 세력,
그리고 현실적인 이익을 지키려는 쪽과 역사의 근본을 세우려는 쪽,
이 둘 사이의 갈등을 임종국은 선택의 문제라 여기지 않았다.
역사 앞에 그것은 너무나 명료하고도 절실한 문제였다.
임종국은 역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았다.
병든 곳을 잘라내거나 치유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도 계속 성장할 수도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임종국은 친일 문제 연구에 보다 집중하기 위해서
천안에 한 산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곳에서 땀흘려 밤농사를 지었고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연구비를 충당했다.
친일 연구는 돈도 따르지 않고 명에도 돌아오지 않는 일이었다.
그의 생활은 정말로 가난했다.
그러나 그는 권익이나 자본에 결탁하지 않았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준다 해도 시간을 빼앗길까 거절했고,
붓끝이 흐려질까 사양했다.
어렵게 살면서도 주위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재력가가 있었음에도
나는 너같은 놈의 돈은 받지 않겠다 면서 단호히 거절했다.

고집을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은 외로운 길이었다.
아무도 박수를 보내지 않는 길이었기에 더욱 쓸쓸했다.
가끔씩 찾아와주는 친구들만이 그의 큰 뜻을 알아줄 뿐이었다.
그러던 몇년 후 그는 요산제를 내려와 천안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더 이상 밤농사만으로는 연구비를 충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연구에만 전념하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다 팔아 집 한 채만 남기고
나머지는 연구비로 쓰기 위해서 내려왔던 것이다.

다섯평 남짓 작은 서재는 그가 일생에 받쳐 수집한 자료들로 가득했다.
이 방안에서 그는 필생의 작업을 마무리할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모두 10권 규모의 친일파총사 작업, 사상 침략, 정치 침략, 문화 침략 등
모두 10개의 세부사항으로 나누어서
지금까지 그가 해온 연구를 총정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예상 원고지 분량 20만 매, 집필기간만 해도 8년 이상 걸리는 대규모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료 정리를 모두 마치고 막 집필에 들어가려는데 그에게 안타까운 고비가 찾아든다.
담배를 매우 즐겼던 그에게 폐기종이란 진단이 나온 것이다.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하면서도 친일파총사 집필에 대한 그의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1876년부터 1945년의 모든 사회분야에 걸친
 침략배족사 전8권을 8년 작정으로 완결할 생각이다.
 그러고서도 천수가 남으면 가볍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잃어버린 문학사회사의 꿈이나 쫓고싶다.
 친일배족사 8권을 끝내기 전에는 고향(문학)이 그리워도 갈 수가 없고,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내 필생의 작업-제2의 매국 반민법 폐기]중에서

그러나 그에겐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친일파총사에 대한 계획도 그리고 다시 문학으로 돌아가리란 희망도
모두 미완으로 남겨둔 채 그는 그만 펜을 놓아야 했다.
1989년 11월, 그는 60세로 생을 마감했다.
꽃 한 송이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영정 앞엔
그가 손수 적은 친일파 인명 카드가 바쳐졌다.

"권력 대신 하늘만한 자유를 원했지만
 지금의 나는 5평 서재 속에서 글을 쓰는 자유밖에 가진 것이 없다.
 야인이요, 백면서생으로 60년을 살았지만 내게 후회는 없다.
 중뿔난 짓이었어도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내 산 자리가 허망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임종국, 그가 떠난 자리에는 그가 직접 손으로 써서 만든 1만2천명 인명카드를 비롯해서
수많은 자료들만이 남아있다.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채 자료들로만 남아있는
그의 친일파총사 계획은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제 청산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친일파들이 정권을 바꿔가며 비틀어놓은 우리 현대사의 왜곡을 바로잡는 일,
임종국은 그것이야말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 생각했다.
제 2의 반민특위가 부활하려는 지금,
그것으로 비뚤어진 우리 현대사의 진상이나마 밝혀낸다면,
임종국, 그가 혼자 걸어온 길은 결코 외롭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일랜드는  300년 만에  압박을 벗었고 유대 민족은 2천년을 나라 없이 떠돌아다녔으나,
 그들은  민족의  전통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35년으로 이 지경까지 타락했었다는 것은
 단순히 친일자들의 수치로만 끝날 일이 아니다.  민족 전체의 수치로서,
 맹성은 물론 환골탈태의 결사적 고행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정기를 좀먹었고,
 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
 이 흙탕물을 걷어내지 못하는 한 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다."
 -[임종국]


[친일문학론]에 실린 친일문인단체와 친일파

■친일단체--------------------------------------

조선문예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황군위로작가단
조선문인협회
국민총력조선연맹
황도학회
임전대책협의회
흥아보국단준비위원회
조선임전보국단
대동아문학자대회
조선문인보국회
만주국예문가회의
대화동맹
조선언론보국회
대의당

■친일파----------------------------------------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량  김소운  김안서
김용제  김종한  김팔봉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백   철  유진오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효석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용만  주요한
채만식  최남선  최재서 


※ 이 글은 KBS 인물현대사 9회 "배반의 역사를 고발하다-임종국"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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