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입니다.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찢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일새에 해 온 일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강상(綱常)을 어지럽힌 더러운 행동을 보면 다시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요망한 참언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그의 장기이니…….
(광해군일기, 10년 윤 4월 29일)

 섬뜩한 글이다. 강상을 어지럽혔고 참언이 장기인 자,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일까? 당대에는 그를 역적의 전형으로 평가했으나 후대에 와서는 진취적이며 혁신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자, 바로 조선 중기의 문신 겸 소설가 허균(許筠)이다.

 허균은 양천 허씨 명문가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허균이 태어난 곳은 외가인 강릉이었는데 조그마한 야산이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교산(蛟山:교는 이무기)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그리하여 허균은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고 하였다. 훗날 허균이 그 뛰어난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이무기처럼 뜻을 펴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것을 생각하면 자못 의미심장하다.

 허균에게는 여자 신동이라고 불리며 후대에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평가받는 누이 난설헌이 있었다. 허균은 난설헌과 함께 중형 허봉의 벗인 이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달은 조선 중기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이라 불릴 만큼 재주가 뛰어났지만, 서자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높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던 인물이다. 이런 성장 배경은 훗날 허균의 사회 개혁론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리라 여겨진다.

 허균의 개혁 의지가 가장 잘 드러난 글은 [유재론(遺才論)]과 [호민론(豪民論)]이다. 허균은 [유재론]에서 서출이라 하여 능력 있는 인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점임을 지적하고, 서얼 차별은 많은 사람들의 불만으로 표출되어 결국 하늘을 거스르는 행위임을 강력히 경고했다. 또 [호민론]에서는 ‘천하에 두려워 할 바는 백성뿐’ 이라고 전제한 후, 특히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을 ’호민‘이라고 하였다. 역사 속에서 민중의 힘을 발견하고 능력 있는 인재의 적극 등용을 소신껏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개혁사상이 한 편의 소설로 엮인 것이 바로 [홍길동전]이다.

 허균이 이렇게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시대를 앞서 나가게 된 것은 독자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성리학적 공부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독서는 하나의 절대적 결론으로 모든 것을 귀결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허균의 독서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고,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가거나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은 그를 더 넓은 사상적 혹은 문학적 세계로 이끌었다.

 허균의 장서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여러 자료를 통해 볼 때 최소한 1만∼2만 권대를 오가지 않았을까 싶다. 또 허균은 이 많은 책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선비들에게 빌려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도 하였다.

 경포호 옆의 별장으로 가서 집 하나를 비우고 그 책들을 보관했다. 고을의 모든 유생들이 함께 빌려 읽고 싶으면 그곳으로 가서 읽은 후 다시 그곳에 보관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으니, 이공택의 산방고사와 같았다. 이로써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려는 유인길 부사의 뜻을 거의 완성하는 셈이 되었다.

 의관과 문필을 갖춘 선비들로 하여금 줄지어 빽빽이 서기를, 옛날 번성했던 때와 같이 한다면 나 역시 그 공적을 함께 가지는 것이니, 다행스럽지 않은가. 나는 세상의 곤액(困厄)을 당해 관직 생활은 오히려 쓸쓸하나 장차 벼슬을 버리고 영동으로 돌아가서 만 권 책 속에 좀벌레가 되어 남은 삶을 마치려 한다.

 스스로 ‘만 권 책 속의 좀벌레가’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밝히는 것을 보면 그는 단순한 도서 수집가가 아닌 독서가로서의 삶을 즐겼던 것이다.

 은거자의 정신적 물질적인 생활을 위해 중국의 은거자들에 대한 자료와 농사법에 관한 정보를 수록한 그의 [한정록]을 보면, 무려 96종의 도서가 인용되었다. 인용된 도서는 중국의 고전으로부터 당대에 유행하던 문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허균의 독서 범위가 굉장히 넓었음을 말해준다. [한정록] 중에서 독서와 관련된 부분을 몇 구절 찾아보자.

 주희는 “학문을 하는 도리는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고 사색하는 일이 가장 앞자리에 있고,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고 사색하는 일의 핵심은 독서가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서는 모르는 것에서 앎이 생겨나고, 잘 아는데서 모르는 것이 생겨나도록 해야 한다.

 독서하기 좋은 때가 있다. 여기에는 위나라 사람인 동우가 말한 ‘삼여지설(三餘之說)’이 가장 이치에 들어맞는다. 그는 ‘밤은 낮이 남겨 놓은 여분의 시간이다. 비 오는 날은 맑은 날이 남겨 놓은 여분의 시간이다. 겨울은 한 해가 남겨 놓은 여분의 시간이다. 이러한 여분의 시간에는 사람들의 일이 다소간 한가로워져,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 독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가자는 “가장 즐거운 것으로는 독서가 으뜸이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자식을 가르치는 일이 으뜸이다. 가장 부유한 것으로는 기와로 지붕을 덮는 일이 으뜸이고, 가장 곤란하고 궁색한 것으로는 전답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기는 일이 으뜸이다”라고 했다.

 독서는 사람의 타고난 기질과 성품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정신과 지혜까지 닦고 기를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이치와 뜻이 사람의 마음을 한 가지로 모아주기 때문이다. 책이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을 때 의심스러운 곳을 제멋대로 고치지 않는 사람은 일생 동안 공허한 주장이나 허튼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오직 독서만은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고 해로움을 주지 않으며, 오직 자연만은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고 해로움을 주지 않는다. 오직 바람과 달, 꽃과 대나무만은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고 해로움을 주지 않으며, 오직 단정하게 앉아 말없이 고요하게 지내는 생활이 사람에게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고 해로움을 주지 않는다. 이와 같은 네 가지를 ‘지극한 즐거움'이라 말한다.

 한국사에는 수많은 천재가 나타나고 사라졌지만, 허균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은 흔치가 않다. 그가 살았던 사회는 그의 사상을 불온한 것으로 여겼고, 과격하고 자유분방한 성향은 그로 하여금 역적으로 삶을 마감하게 했다. 그를 개혁가로 보느냐, 기회주의자로 보느냐는 더 많은 검토가 있어야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독서를 즐기고, 자연 속에서 사색의 기쁨을 느꼈던 진정한 조선의 로맨티스트였다.



고등학생을 위한 역사도서 길라잡이
-역사와의 만남과 소통
교육인적자원부
광주광역시교육청
2008.1.22 (주)성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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