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씨(석가모니)는 신하 및 자식으로서 임금과 아비를 배반하고 달아나 산중으로 들어가 적멸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만약 그 법을 본받는다면 반드시 온 나라의 백성들이 머리를 깎아 종묘의 제사가 끊어질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억불책으로 불교가 수난을 당했던 시대였다. 세종은 선교 양종 각 18사씩 전국에 36사만을 공인했다. 또 성 밖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후 승려들은 안양 청계사 주변 사찰에서 옷을 갈아입고 한양에 출입했다고 한다.
 또한 연산군은 북한산의 모든 절을 부수고 승려를 내쫓았으며, 성 내의 비구니 사찰을 없앤 뒤 비구니들을 노비로 만들었다. 그 외의 승려들도 환속시켜 관노비로 삼거나 억지로 혼인시켰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의 의병 활동으로 국난 극복의 공을 인정받아 상대적으로 탄압이 줄기도 했지만,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정책은 달라지지 않았다. 승려들에게 남한산성 등 주요 산성을 쌓고 수비하는 일을 모두 맡겼고, 종이, 기름, 신발 등을 만들어 바치게 했으며, 그 밖의 잡역을 부담시켰다. 승려들이 사실상 천인 대우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같은 상황 속에서 참선, 염불 등 수행을 하는 승려들은 절의 사무와 관가나 유생들에 의해 주어지는 잡역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어, 가급적이면 이를 피해 산중의 암자에 머물렀다. 이에 따라 남아있는 승려들은 자연히 절을 운영하고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승려들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된다.
 수행에 전념하는 승려를 이판승(理判僧)이라 하고, 절의 여러 사무를 맡아보는 주지 등의 승려를 사판승(事判僧)이라했다. 이판승은 잡무를 멀리하고 공부와 수행으로 불교의 명맥을 이어갔고, 사판승은 비록 공부에는 힘쓰지 못했으나 유생들과 위정자들의 횡포를 견디면서, 절을 지켰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말은 이렇게 생겨난 말이다.


- 백유선, "우리 불교 문화유산 읽기", 두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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