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에 대해서 만큼은 학교에서 확실하게 배운다.
(확실하게 배웠다는 것이 제대로 배웠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종의 뛰어난 업적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한문으로 된 수학 문제를 풀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세종대왕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를...

1418년에 왕위에 오른 후 54세를 일기로 승하할 때까지 햇수로 33년에 이르는 그의 재위기간 동안 그는 쉼없이 무언가 연구하고 만들어냈다.

"깊은 밤 집현전에서 책을 보다 잠든 신숙주의 어깨에 곤룡포를 덮어주고 뜰로 나온 세종, 그는 눈을 들어 궁궐의 처마끝에 걸려있는 달을 바라본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세종이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그게 측우기였을까? 아니면 해시계였을까...
아마도 세종이 그의 재위기간 내내 골몰했던 문제는 '공법(貢法)'이었을 것 같다.
(최종 확정된 '공법'의 주요 내용은 '전분6등법','연분9등법'이다)

국가의 주요 세원(稅源)이었던 전세(토지세)에 관한 개혁법안인 공법은 세종 9년에 처음 그 논의가 시작된 이래 세종 26년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무려 18년에 걸쳐 만들어진 세법이다.

세제 개혁에 대한 세종의 의지는 놀라웠다. 그는 위로는 중앙의 관료, 아래로는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신분귀천을 가리지 않고 의견을 묻는다. 이른바 구언(求言)이라는 것인데, 이에 17만여 명에 달하는 신하, 백성들이 자신의 의견을 올린다. 그리고 전제상정소를 설치하는 한편 정인지 등으로 하여금 조사와 연구를 진행시킨다. 그리고 또 다시 여론을 들어서 그 내용을 고친다. 그렇게 여러 차례 반복되는 과정을 거쳐 18년만에 법을 확정한다.

세종의 세제 개혁 과정에는 그가 합리적 과세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가 잘 나타나 있다. 토질에 따라, 또 그 해의 수확량에 따라 적정한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하겠다는 것, 이는 조세제도에 대한 세종의 확고한 철학이자 공법 제정의 정신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법인세는 낮추고 소주세는 올린다는 얘기만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조세 저항 때문에 재산세를 올릴 수 없다느니, 부자들의 세금이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오르면 100% 인상이라느니... 또한 세수 부족의 원인은 불투명한데 해결책은 간단하기만 해서, 경제관료들은 입만 열면 손쉽게 걷을 수 있는 간접세 얘기를 꺼내고 있다. 유류세 인하 불가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간접세의 전방위 십자포화로 전멸 위기에 빠진 건 몰락하고 있는 중산층과 가난한 서민들 뿐이다.

세종은 공법 논의를 시작하면서 과거시험문제를 본인이 직접 출제했다고 한다.

그가 출제한 것은 '시제(詩題)'와 '운자(韻字)'가 아니었다. '4서3경'도 아니었다.

세종의 과거시험문제는 전세에 대한 개편 방안을 쓰라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논술고사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가 미래에 관리가 될 사람들에게 물었던 것은 국가 경륜의 방안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 관료들도 세종의 논술고사를 한 번쯤 봐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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