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의 독서에 대한 글을 읽다보면 유독 ‘다독(多讀)’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옛 사람들의 다독은 오늘날처럼 여러 권수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었다. 그 독서의 횟수도 열 번, 스무 번이 아니라 천 번, 만 번씩이었다.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안정복이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던 신후담을 만나 독서의 방법에 대핸 토론했다는 이야기이다.

 성현의 글은 만 번쯤 일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비근한 일을 들어 비유하자면, 백 아름되는 나무를 베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큰 도끼로 찍어야만 벨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현의 말씀으로 말하자면 그 의미의 심오함이 어찌 큰 나무에 비교할 정도이겠는가. 반드시 많이 읽은 다음이라야 대강이나마 그 의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글을 읽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한두 번 훑어보고는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니, 뜻을 터득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이것이야말로 조그마한 낫으로 큰 나무를 베다가 겨우 껍질이나 조금 벗기는데 그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데 여기에 만 번도 아니고, 한 권의 책을 1억 번씩 읽었던 독서광이 있다. 바로 조선 중기의 시인 백곡 김득신이다. 김득신에 대한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다른 위인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는 많이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김치가 꿈에 노자를 만나 그의 호를 몽담(夢聃)으로 지어주었다. 하지만 신통한 태몽을 꾸고 태어난 아이는 머리가 너무 나빴다. 10살에야 비로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진척이 없었다. 주위에서 저런 둔재가 있느냐고 혀를 내둘러도 그의 아버지는 “나는 저 아이가 저리 미욱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니 그것이 오히려 대견스럽네. 하물며 대기만성이라 하지 않는가?”하면서 그를 감싸주었다.

 이러한 부친의 노력의 결과, 김득신은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서 글 한 편을 지어 올리기에 이르렀다. 아버지도 감동하고 김득신도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이후 그는 더욱 정진하여 뒤늦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성균관에 들어간 뒤에도 길을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남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항상 글을 외웠다. 밤에는 늘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김득신의 성실함과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다음의 [독수기(讀數記)] 한 편만 읽어봐도 알 수가 있다.

 [백이전]은 1억 3천 번을 읽었고, [노자전],[분왕],[벽력금], [주책], [능허대기], [의금장], [보망장]은 2천 번을 읽었다. [제책], [귀신장], [목가산기], [제구양문], [중용서]는 1만 8천 번 [용설]은 2만 번 읽었고, [제약어문]은 1만 4천 번을 읽었다.

 그의 독서는 만 번 이하로 읽은 것은 아예 꼽지도 않았으며, 지금처럼 눈으로 훑어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리듬을 얹어 소리 내어 읽는 성독(聲讀)이고 보면 그 횟수에는 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다.

 하지만 타고난 둔한 재질은 어쩔 수가 없었던 듯, 홍한주의 [지수염필]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김득신은 지혜가 부족하고 재주가 몹시 노둔했는데도 외워 읽기를 몹시 부지런히 했다. 독서록이 있었는데 천 번을 읽지 않은 것은 기록에 올리지도 않았다. 사마천의 [사기]중에 [백이전]같은 것은 1억 1만 3천 번을 읽기에 이르렀다.

 뒤에 한번은 말을 타고 어떤 사람 집을 지나가는데, 책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글이 아주 익숙한데, 무슨 글인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말고삐를 끌던 하인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부학자(夫學者) 재적극박(載籍㥛博) 어쩌고 저쩌고 한 것은 나리가 평생 맨날 읽으신 것이니 쇤네도 알겠습니다요. 나리가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김득신은 그제야 그 글이 [백이전]임을 깨달았다. 그 노둔함이 이와 같았다. 하지만 만년에는 능히 시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는 백이전을 1억 1만 3천 번 읽은 것으로 이름났다. 이때 1억은 지금의 10만을 가리키니, 실제 그가 읽은 횟수는 11만 3천 번이다. 그 자신도 자신의 거처를 ‘억만재(億萬齋)'라고 할 만큼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얼마나 머리가 나빴으면 그는 길가다 우연히 들려온 백이전의 한 구절을 기억 못했다. 말고삐를 끌던 하인조차 질리게 들어 줄줄 외우던 글을 말이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또 한식날 말 타고 들 밖으로 나갔다가 도중에 5언시 한 구절을 얻었다. 그 구절은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이었다. 마땅한 대구를 찾지 못해 끙끙대자, 말고삐를 잡고 가던 하인 녀석이 연유를 물었다. 마땅한 대구를 못 찾아 그런다고 하니, 녀석이 대뜸 ‘도중속모춘(途中屬暮春)’을 외치는 것이 아닌가?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나니, 도중에 늦은 봄을 맞이하였네.”로 그럴싸한 대구가 되었다.

 깜짝 놀란 김득신은 그 즉시 말에서 내리더니 “네 재주가 나 보다 나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네 말구종을 들겠다.”하고는 하인 녀석더러 말을 타게 했다. 하인은 씩 웃으며, 사실은 이 구절이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라, 나리가 날마다 외우시던 당시(唐詩)가 아니냐고 했다. ‘아! 참 그렇지’하며 김득신은 자기 머리를 쥐어박았다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김득신의 노둔함을 자주 화제에 올렸지만, 그를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끊임없는 노력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천재는 많다. 그러나 어려운 책을 몇 번 읽고도 줄줄 외웠다던 천재들의 이야기는 풍문으로 전해질 뿐 글로써 만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김득신을 그렇지 않았다. 그러기에 후세 사람들이 김득신의 그 성실함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서우는 [백곡집] 서문에서 김득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존경의 마음을 표하였다.

 대저 사람은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데서 뜻이 꺾이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느라 학업을 성취하지 못하며, 마구잡이로 얻으려는 데서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공은 젊어서 노둔하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독서에 힘을 쏟았으니 그 뜻을 세운 자라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 읽기를 억 번 만에 이르고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작은 것을 포개고 쌓아 부족함을 안 뒤에 이를 얻었으니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 어려서 깨달아 기억을 잘한 사람은 세상에 적지 않다. 날마다 천 마디 말을 외워 입만 열면 사람을 놀라게 하고, 훌륭한 말을 민첩하게 쏟아내니, 재주가 몹시 아름답다 하겠다. 하지만 스스로를 저버려 게으름을 부리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그만 두어 버리고, 늙어서도 세상에 들림이 없으니, 공과 견주어 본다면 어떠하겠는가?

 마지막으로 김득신이 스스로 지은 묘비명을 인용하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맺는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렸을 따름이다.


고등학생을 위한 역사도서 길라잡이

-역사와의 만남과 소통

교육인적자원부

광주광역시교육청

2008.1.22 (주)성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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