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41년 을유년 겨울 청나라 수도 베이징의 한 거리, 조선에서 온 젊은 선비가 벽면을 가득 메운 수만 권의 책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그 거리에는 모두 7곳의 서점이 있었는데 서점의 3면벽에는 십 몇 층의 시렁이 메어져 있고, 책들은 상아로 만든 표찰로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얼굴을 들어 한참을 보고 있노라면 책 제목을 다 읽기도 전에 눈이 어질어질해지고 현기증이 들었다. 이 선비가 서 있는 곳은 베이징의 서적과 서화의 골동품 시장 유리창(琉璃廠) 거리, 그리고 그는 바로 한국의 코페르니쿠스 홍대용이었다.

 담헌 홍대용(洪大容, 1731~1783), 그는 일찍이 박지원, 박제가와 깊은 친교를 맺으면서 실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65년 숙부 홍억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함께 군관으로 수행하여 베이징에 갔는데, 그 곳에서 청나라의 학자인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사귀게 된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홍대용은 청나라의 학자들과 경전, 역사, 성리학, 풍속, 시론 등에 대해 폭 넓은 토론을 벌였고, 북경에서 보낸 6개월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

 홍대용은 귀국한 이후에도 청나라 학자들과 서신 교환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청나라 학문을 받아들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많은 유학자들이 청나라를 오랑캐로 인식하면서 청의 문물을 배격하였는데, 홍대용은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청을 비롯한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의산문답]을 통해 지구의 자전설과 서양 천문학, 과학 기술을 소개하였으며, 또한 균전제와 부병제를 토대로 하는 경제 정책의 개혁,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공거제에 의한 인재 등용, 신분의 차이 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혁신적인 교육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시대를 앞서 나간 실학자 홍대용에게 독서란 무엇이었을까? [담헌서]를 통해서 그의 독서 비결을 살펴보자.

 나는 일찍부터 맹자가 말한 ‘내 뜻대로 다른 사람의 뜻을 생각해 본다’라는 이의역지(以意逆志)를 독서의 비결로 삼았다.

 옛 사람이 지은 글은 뜻과 이치뿐만 아니라, 시 등을 편(篇)을 짓는 방법이나 문자의 첫 머리와 끝맺음 등 사소한 기법조차도 반드시 각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뜻이 옛 사람의 뜻을 받아들여, 하나로 합쳐져 틈이 없고 서로 마음이 맞아 즐거움을 얻었다면 곧 옛 사람의 정신과 견문, 식견이 나의 마음을 뜷고 들어와 서로 통하게 된 것이다. 굿을 할 때 신령이 내려와 사람에게 붙게 되면 갑자기 무당이 환히 깨닫게 되는데, 정작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문장의 구절과 주석을 의지하지 않고, 케케묵은 자취를 그대로 따르지 않으며, 온갖 사물의 변화를 이리저리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나가다 보면, 나 역시 옛 사람처럼 될 수 있다.

 홍대용도 독서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독서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겪지 않고서, 일시적인 편안함만 찾다보면 결국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스스로 굳세게 마음먹고, 자신을 점검하여 독서에 매진한다면 열흘 안에 괴로움과 어려움이 사라지고, 독서의 세계는 점점 넓어져 손이 저절로 춤을 추고 발이 저절로 뛰어오르게 되어 끝도 없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길어봐야 100년을 넘지 못한다. 그 동안에도 근심거리나 재앙 그리고 고난은 쉴 틈을 주지 않고 찾아든다. 이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독서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란 얼마 되지 않는다.

 또한 독서는 단순히 글을 읽고, 지식을 탐구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홍대용은 독서를 여행을 위한 노정기에 비유하면서, 아는 것 못지않게 그것의 실천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독서는 장차 진리를 명백하게 밝혀 온갖 일에 적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진실로 정확하고 세밀하게 읽었고,  학문과 공부를 익히는 일에 익숙하고, 제대로 보고 진실로 안다면, 책이란 아무 소용도 없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므로 묶어서 높디높은 다락에 처박아 두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정확하고 세밀한 것, 익숙해지는 것, 확실하고 참된 것이란 성인도 모두 이루지 못하는 법이니, 독서와 공부는 참으로 끝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학문하는 사람들이 평생토록 매달려야 할 일이다.

 ‘앎과 실천’ 두 가지 일은 진실로 어느 한 쪽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나 무겁고 가벼움 또한 큰 차이와 구별이 있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잘못 들어가게 되면, ‘돈오(頓悟:갑작스럽게 깨닫는 것)’에 빠져들거나 아니면 ‘훈고(訓詁:고리타분한 해석)’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지금 우리들은 거칠고 또한 순서 없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고 있다. 이 때문에 정확하거나 세밀하지 못하고, 익숙하지도 않다. 또한 어찌 확실하고 참된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 할 수 있겠는가?

 독서하는 데 들이는 공로와 정력이 이와 같은데도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곧바로 내가 할 일은 다 끝냈다고 하면서 함부로 날뛰며 망령된 행동을 제멋대로 한다. 이것은 독서를 마친 후 그 내용을 실천해야 하는 큰일을 알지 못해 나오는 행동이다.

 먼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에 비유하자면, 독서는 여행할 길의 지도와 안내를 담은 노정기이고, 실천은 말을 먹이고, 수레바퀴에 기름칠을 하고 또 노정기를 살펴 여행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은 달리지도 못하게 잡아 매놓고 수레는 손질만 해놓았을 뿐 몰지 않은 채 오로지 여행할 길의 지도와 안내를 담고 있는 노정기만 읽거나 토론하고 있다. 먼 길을 가려고 하는 계획을 아무리 잘 세워도 끝내 성공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홍대용이 베이징에 갔을 당시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 중종과 명종 때 조정에서 서점을 설치하자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서점은 끝내 만들어지지 않았다. 비단 서적에 관한 수요가 적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수요는 있었지만, 그 수요를 충족시키고 더 자극할 만한 의지와 정책이 없었던 것이다. 서점 대신 서적 유통을 맡았던 것은 개인적으로 서적 매매를 중개하는, 서적 거간꾼인 서쾌였다. 이 서쾌가 18세기 말까지 사대부 집을 돌아다니면서 서적 유통을 장악했었으니, 홍대용이 베이징의 거대한 서점을 보고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은 수 만권의 책을 너무나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책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탐구하는 열정은 오히려 책의 양과 반비례가 되어가고 있다. 맹자의 자질도 배우고 닦지 않으면 범부, 천졸(賤卒)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옥도 다듬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재목도 깎지 않을 수 없으며 사람도 배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배울 줄 모른다면 지혜롭다 할 수 있겠으며,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다면 의롭다 할 수 있겠으며, 할 줄 알면서도 힘껏 하지 않는다면 용기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알아서 행하고 용기로 과감히 실천하여 배움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선비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다.


고등학생을 위한 역사도서 길라잡이

-역사와의 만남과 소통

교육인적자원부

광주광역시교육청

2008.1.22 (주)성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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