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 홍길주는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문인이다. 벼슬길에 거의 나아가지 않았고, 문집이 공개적으로 간행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대의 명망에 비해 오늘날 그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에 이르러서 그의 저서 [수여방필], [수여연필], [수여난필], [수여난필속]을 번역하여 한 권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방필(放筆)이란 공부하는 여가에 생각나는 대로 붓을 내달린 비망록이란 뜻이며, 이를 부연한 것이 ‘연필’(演筆)이고, ‘난필’(灡筆)이란 그 나머지 넘쳐흐른 것을 수습했다는 뜻이다.
 홍길주는 수여방필 4부작에 대해 처음에는 한가로움을 소견하기 위해 적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필묵을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가슴 속에 대나무가 그려져 가득 차 막힌 듯하고, 잠시만 놓아두면 흩어져버리므로, 그때그때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행여 달아날세라 적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글 속에는 사소한 일상사에서부터 그때그때 스쳐지나간 생각, 그리고 당시 지식인의 구체적인 관심사를 아주 생생하게 담고 있다. 그 중 독서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찾아보자.

 옛 사람의 뛰어난 작품과 다른 사람의 걸출한 글을 읽고 나서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더구나 끝내 그 아름다움을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까닭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구절이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느낄 뿐, 그 구절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지은이가 머릿속에서 생각을 일으켜 굴리거나 혹은 뚝 끊는 표현의 경로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 이름 높은 누각과 신비로운 경치를 보고 돌아왔다고 치자. 누각에서 바라본 강과 산, 안개 낀 숲의 빼어난 모습이나 그 속에 담겨 있는 대와 나무, 바위와 돌의 기이한 풍경에 대해서는 일일이  기억하면서, 어디서 시작해 어느 길을 따라 걸었는지 혹은 어떤 고을을 거쳤거나 어느 주막에서 자고 무슨 고개를 넘었는지, 어느 계곡을 건너 어떤 곳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전혀 묻지 않아, 다음에도 길 안내를 받지 않고서는 끝내 갈 수 없는 신세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름난 옛 문장가를 본받고자 하거나 앞선 시대의 훌륭한 거장을 따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이 작품을 지을 때, 정신과 사고가 어디에서 시작해 어떤 경로를 따라갔는가를 살펴보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바람직한 독서를 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자신이 얻은 것이 그 사람이 생각을 일으켜 이렇게 저렇게 표현한 경로와 반드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앞서 지적한 방식대로 노력하면 틀림없이 언젠가는 서로 하나가 되어 미묘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옛 사람의 글을 읽다 보면, 글이 참 지루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한문을 번역하는 데서 오는 딱딱함과 쉽게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 그리고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의 간격으로 달라진 삶의 모습 등이 옛 글을 옛 사람들만의 글로 치부해 버리게 한다. 그러나 진리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고, 오히려 훌륭한 선인들의 가르침은 동시대의 그 어떤 학자들보다도 깊은 가르침을 준다. 훌륭한 작품을 읽고 내 것으로 소화하려면 시대가 달라졌음을 탓하지 말고, 시대를 거슬러 옛 사람의 생각을 차분히 따라가야 한다. 그러면 홍길주의 가르침처럼 언젠가는 옛 사람과 하나가 되어 미묘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홍길주는 다음과 같은 글도 남겼다.

 예전에 한 번은 [설부]라는 책을 놓아둔 적이 있다. 그런데 우연찮게 손님이 그 가운데 한 권을 뽑아들고 채소를 심는 방법이 적혀 있는 부분을 보았다. 밖으로 나간 그 손님은 설부는 농작물을 가꾸는 일을 적어놓은 농서라고 떠들고 다녔다.
 또한 일찍이 내가 유가에 관한 책 하나를 얻은 적이 있다. 그 책을 보던 중 빈 곳에다가 여러 가지 잡스런 병에 대한 경험을 여러 조목에 걸쳐 적어놓았다. 그런데 때마침 손님이 그곳에 적힌 내용을 보고는 그 책을 의학 책이라고 여겼다. 이는 참으로 안목이 누추하고 빈약한 사람의 행동이다. 학문과 식견이 없는 선비 중에서도 더러 이와 같은 고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청나라의 학자 기효람이 [사고전서]를 바로잡을 때, 그 내용이 너무나 방대해 자세하게 살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종종 한두 군데를 펼쳐보고 말았는데, 이로 인해 빠지거나 잘못 적은 부분이 생겨나 마침내 그 전체 내용을 덮어버렸다. 이를 두고 어떻게 앞서 내가 예로 든 ‘손님이 설부를 보고 농사 책이라고 떠든 것’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세상에서는 대체로 하나의 사건으로 한 시대를 판단한다. 또 한 마디의 말은 한 사람의 전부를 덮고도 남는다고 여긴다. 이 두 가지는 책의 한 부분만을 읽고, 전체를 알았다고 떠들어대는 행동과 똑같은 종류의 일이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다 보니 종종 실수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책을 살 때도 서점에서 책의 목차와 내용을 꼼꼼하게 살피고 구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검색한 책의 제목과 몇 줄의 홍보 문구, 공개된 본문 몇 장만 읽고 책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 책상 앞에 앉아서 발품 안들이고 쉽게 책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편리하지만, 때로는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 또는 굉장히 빈약한 내용의 책이 배달되기도 한다.
 또 예전에는 책을 찾아 의문을 해소하던 것이 요즘에는 인터넷에서 클릭 몇 번으로 쉽게 해결하게 된다. 책을 일일이 찾아보는 수고는 덜었지만, 당장 필요한 정보만 섭취하고 나머지는 뱉으니 지식이 체계적으로 쌓일 겨를이 없다. 오히려 쉽게 얻은 얕은 지식, 때로는 출처 불분명한 잘못된 지식으로 큰 낭패를 보게 된다. 앎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면 보다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튼튼한 길을 밟아 나아가야 더 큰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홍길주는 무조건 많이 읽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독서법을 찾을 것을 권하였다.

 나는 독서할 때 수백 번을 넘겨본 적이 없다. 적게 읽었을 때는 30번 내지 40번을 읽다가 멈추곤 했다. 친구 가운데 독서에 힘을 쏟는 사람들은 한 권의 책을 더러 천만 번을 읽고서,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학문의 힘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체로 재주와 역량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정한 규정과 기준을 정해놓고 무조건 따르도록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은 요령을 피우거나 시간과 수고를 줄여보자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자신을 잘 이끌고 독려하는 법을 찾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천 홍석주가 홍길주에게 했던 이야기로 그에 대한 글을 맺고자 한다. 홍석주는 홍길주의 형이자 스승이었다.

 한 권의 책을 모두 읽을 만한 여유를 기다렸다가 책을 펼쳐 든다면 평생토록 독서할 수 있는 날을 찾지 못할 것이다. 비록 매우 바쁘더라도 한 글자를 읽을 수 있는 틈이 나면 반드시 한 글자라도 읽어야 한다.


고등학생을 위한 역사도서 길라잡이

-역사와의 만남과 소통

교육인적자원부

광주광역시교육청

2008.1.22 (주)성문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