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대 초 중국 베이지의 출판사 인화당에서 조선 학자의 책이 호화 활자판으로 출간되었다. 조선 말기의 학자 혜강 최한기의 [기측체의(氣測體義)]였다. 기측체의는 기의 원론을 논한 ‘신기통(神氣通)’과 기의 응용을 논한 ‘추측록(推測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수백 년간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 대신 기를 내세운 새로운 학문 체계를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 최한기는 어떤 인물인가?

 혜강 최한기는 서울에서 책만 사다 책값으로 재산을 탕진해 버렸다. 그래서 도성 밖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어느 친구가 ‘아예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 게 어떻겠느냐?’ 하니까. ‘에끼 미친 소리 말게. 내 생각을 열어주는 것은 오직 책밖에 없을진대, 책사는 데 서울보다 편한 곳이 있을랑가?’ 하고 면박을 주었다.  
- 이건창, [명미당집] -

혜강은 1,000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아마도 이것이 진역(震域:우리나라의 별칭) 저술 상 최고의 기록이고 신, 구학을 통달한 그 내용도 퍽 재미있다.
- 최남선, [조선상식문답속편] -

 개성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왔던 최한기는 변변한 가문 출신도 아니요, 뚜렷한 사승 관계도 없었다. 생원시에는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던, 그래서 오랫동안 역사에서 잊혀 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책을 소장하고 읽었으며, 가장 많은 저술을 남겼다. 관심 영역도 상당히 넓어 오늘날로 말하면,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 모든 영역에 걸쳐 독서하고 글을 썼다.
 그의 저서는 그 시대 다른 이들의 그것이 주로 고전에 대한 주해서가 주류를 이룬 것과는 달리, 자신의 생각을 연역적으로 풀어 썼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수입되고 생성되어 온 수 많은 외래 학문 체계를 광범위하게 읽고 소화하여,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사고 체계를 형성하고 이를 저술에 반영한 것이다. 그는 측시 서학을 비롯한 서양의 과학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일생을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던 최한기는 책을 사기 위해 가산을 다 탕진할 정도였는데, 누가 책을 구하는 데 너무 돈을 쓴다고 나무라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령 이 책 속에 사람이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으면 수천리 길이라도 찾아가야만 할 텐데, 지금 나는 앉아서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책을 구입하는 것이 비용이 많이 들긴 하나 식량을 싸 가지고 멀리 찾아가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독서인로서의 그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또, 최한기는 독서의 즐거움을 의복과 음식이 주는 즐거움에 비교하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복과 음식이 주는 즐거움은 세상살이의 근심과 걱정을 잊도록 해 준다. 반면 독서에서 얻는 즐거움은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의복과 음식 덕분에 보호받으며 자라지만, 그 마음과 성품은 스스로 기르고 얻어서 발전한다. ……
 의복과 음식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이 없는 경우를 독서에서 스스로 깨달아 얻는 일과 비교해 생각해 보자. 의복과 음식에 대한 걱정을 안고 산다면 몸이 제대로 보호되고 자랄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쉽게 안다. 그래서 이들을 구하려고 죽을힘을 쏟으므로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경우가 자못 적지 않다. 그러나 독서를 하여 스스로 깨달아 얻는 것이 없으면  그 마음과 성품이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알기 어렵다. 또한 이것을 얻으려고 힘을 쏟지 않는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독서를 통해 스스로 깨달아 얻는 일에 음식과 의복에 대한 근심을 없애는 일처럼 힘을 쏟는다면, 반드시 스스로 깨달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한기가 독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추측’하는 힘이다.

 독서를 할 때 요령을 얻으려고 하는 이유는 읽은 내용을 잘 지키고 핵심을 요약해 두로 통달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되면 독서한 것을 활용하는데 방도가 생기고, 학문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부터 시간과 정력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일에는 근거가 있고, 행동에는 원칙과 기준이 생긴다. 그러나 만일 요령을 얻지 못할 경우, 평생토록 공부와 독서를 한다 하더라도 학문의 크고 중요한 근본에 다가가지 못하고 세상의 이치에 두루 통달할 수 없다.
 요령을 얻는 방법은 ‘추측’, 곧 미루어 생각하고 헤아려 이치를 깨닫는 것에서 나온다. 추측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요령을 얻는 것이 지나치거나 혹은 모자라서 크게 빗나갈 우려가 있다. 미루어 생각하고 헤아려 이치를 깨닫는 일은 사람이 평생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추측을 통해 얻고 난 다음에야 독서의 요령과 조리가 생겨난다. 그러면 모자라거나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마치 배에 방향을 조종하는 키가 있는 것처럼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가리켜 나아가라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또한 더러는 이렇게 말했다가 또 저렇게 말하는 여러 가지 학설이나 주장이 각자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하게 된다. 독서하는 요령을 얻지 못한다면 학문에 종사한다고 해도 대부분의 생각과 뜻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덮친 것을 취할 뿐이므로 행동은 뚜렷하지 않고, 익힌다고 해도 밝지 못하며, 이쪽에서 겨우 통하다가도 저쪽으로 가면 전혀 통하지 않게 된다.

 최한기는 독서를 과거를 이어 미래를 열어주는 통로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 중간에 위치하는 가르치는 자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독서를 통해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지은이가 주장하는 뜻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런 후에 그 뜻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이것은 세 사람의 마음이 한 권의 책에 담긴 뜻과 의미를 통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이에 어떻게 서로의 잘못된 판단과 생각이 전혀 없을 수 있겠는가?
 지은이가 기록한 내용 중에서도 크고 작은 것, 깊고 얕은 것이 있을 수 있다. 또 그것을 표현할 때에도 번거롭고 복잡하거나 혹은 간략하고 단순한 차이가 있을 것이고, 일을 서술해 기록할 때에도 가장 핵심이 되는 곳과 심오한 것이 있다. 시대에 따라 크게 떠받들고 본받는 것이나 일을 논하는 조목도 마땅히 옛날과 오늘날은 다르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두루 섭렵했느냐 혹은 그렇지 못했느냐에 따라 깨닫고 이해하는 데 크게 차이가 있다. 따라서 경전과 역사서에서 물류나 방술에 이르기까지 천지와 인간사에 관한 모든 학설과 이치를 대체적으로나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알기 쉽도록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지은이,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의 도량과 능력은 그 변화하는 이치가 같지 않다. 이제 독서를 통해 뒤따르는 사람에게 좋은 교훈을 남기려면, 대체로 책의 번거롭고 복잡한 내용과 이해하기 어려운 글귀나 기이하고 괴상한 내용은 깊이 경계하도록 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명백한 사물의 이치와 이해하기 쉬운 글이나 문장들을 권장해야 한다. 그리고 옛 사람이 지은 책을 근본으로 삼아 더욱 환하게 밝히되 옛사람들이 아직 밝히지 못한 것을 반드시 밝혀서 후세에게 물려준다면 가르침의 이치는 크게 열릴 것이다.

 최한기의 스승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번역되어 들어온 서양 각국의 저술가들이며, 당대 중국의 개명한 선구적 사상가들이었다. 때문에 독서인 최한기는 그 시대에 가장 앞서 가는 눈과 생각을 가진 근대인이었고, 그의 시대를 앞서가는 저술들은 모두 독서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고등학생을 위한 역사도서 길라잡이

-역사와의 만남과 소통

교육인적자원부

광주광역시교육청

2008.1.22 (주)성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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