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에서 정점을 이룬 시민 혁명은 전제적인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봉건적 잔재를 제거함으로써 근대 시민 사회와 국민 국가성립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완성시켰다. 그리하여 19세기에는 국민 국가를 단위로 자본주의적 시민 사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 문제를 비롯한 새로운 사회 문제가 제기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도 대두하였다.

 산업 혁명의 불길이 세차게 일어 나던 19세기 초반의 런던 ,대학 입시에 시달리는 일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영국의 청소년들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귀기울여 보자.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제레미아 혜인즈(12살) : "4곱하기 4는 8이고, 4를 4개 더하면 16입니다. ", "왕이란 모든 화폐와 황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왕이 있는데, 그는 여왕이고 그녀의 이름은 알렉산드라 왕녀라고 합니다. ,왕녀는 남자입니다." 윌리암 터너(12살) : "나는 잉글랜드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나라가 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이전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습니다." 에드워드 테일러(15살):"런던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헨리 매튜만(17살) : "자주 교회에 다녔습니다. 설교에 나오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 밖의 다른 이름은 하나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하나도 모릅니다, 그는 살해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어딘가가 다릅니다. 이는 그가 신심이 깊은 데가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소녀 : "악마는 착한 사람입니다. 그가 어디 살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리스도는 나쁜 놈이었습니다."

 이 소녀(10살)는 god을 dog이라고 쓰고 여왕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아동 노동 조사 위원회 보고서 제5차 보고서」 중에서).

 이 아이들은 개그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별난 구석이 있는 아이들은 더욱 아니다. 산업 혁명 당시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교육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받아 보지 못한 채 일터로 내몰려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당했다. 눈부시게 진행되는 산업 혁명의 뒤편에는 당시의 문명 예찬자들을 당혹케 한 이러한 예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산업화로 인하여 기계들이 풍부한 부와 물자를 생산하는 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도처에 가난한 사람들이 넘실대며 아동들이 기막힌 무지 상태에 방치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의 머리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묘한 부조화는 어떻게 발생 한 것일까? 지금부터 산업 혁명 당시로 돌아가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던 것 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산업혁명을 왜 굳이 '혁명'이라고 부르는가?

 산업 혁명은 16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영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클라이맥스로서, 대체로 18세기 후반면 공업에서의 기술 혁신을 시발로 하여 이후 100여 년 동안 진행된 전 산업에 걸친 변혁의 과정을 일컫는다. 하지만 클라이맥스라는 표현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100여 년에 걸친 산업 혁명기 동안에 기술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혁명'이라고 할 만한 폭발적이고 급격한 변화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어떤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도 없었다. 제니 방적기, 와트의 증기 기관, 철도 등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중요한 발명들은 오랜 시일에 걸친 사소한 기술적 발전이 끊임없는 시행 착오의 과정을 거쳐 퇴적된 결과 나타난 것이지 결코 하룻밤 사이에 출현하여 잠들어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사건은 아니었다. 전체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공업 인구의 비중이나 산업 생산 전체에서 차지하는 자본주의적 공업 생산물의 비중 등을 본다면 오히려 영국의 산업화는 19 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의 특징이지 소위 산업 혁명기의 특징으로 볼 수는 없었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기 시작한 1840년대-1850년대에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국은 여전히 농업국이었지 공업국은 아니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산업 혁명이라는 용어 대신 '산업화'라고 부르기를 주장하며 산업 '혁명'이란 것이 과연 존재했는가 하는 의문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데도 구태여 18세기 후반에서 19 세기 전반에 이르는 이 시대를 가리켜 산업 '혁명'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사실 이 용어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40년대 사회 사상가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당대의 사상가들은 점진적인 기술 변화의 배후에서 전개되는 중대한 사회적 변화, 더욱이 되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읽어 냈고 이를 혁명이라는 용어로 적절히 묘사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중세 봉건제하의 양대 세력이었던 봉건 영주와 농노를 대신하여 자본가와 산업 노동자가 사회의 중추 세력으로 등장했다. 또 경제 생활의 중심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하고 도시가 서서히 이루어졌다. 한편 산업 혁명의 선두주자 영국은 막강한 공업력을 무기로하여 세계 시장을 석권하여 경제 활동의 무대를 과거와는 달리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한 민족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문명이냐 아니면 야만이냐를 결정하게 되는 사상 유례가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산업 혁명이 혁명일 수 있는 까닭은 이러한 근본적 변화의 중심 축에 바로 그것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왜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을까 ?

-해상권 장악과 무역 독점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의 본격적 발전을 위한 유리한 전제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선 영국은 1588년 스페인 무적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16세기 내내 진행된 네덜란드, 스페인과의 해상권 쟁탈전에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17세기에는 모직물을 비롯한 상품무역과 노예시장을 독점하고 유럽과 아메리카 식민지, 인도를 연결하는 황금의 삼각 무역을 통해 막대한 상업적 부를 축적하게 된다. 아직 자본주의가 확립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무역 독점으로 생긴 이득은 자본주의 발전과 산업 혁명에 필요한 화폐적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전제 조건은 국내에서 조성되고 있었다. 14세기에 장원 경제의 붕괴 과정이 개시된 이래 다양한 자영 농민과 자영 수공업자들이 등장하였고 자급 자족적인 장원 경제를 대신하여 지역별 시장권이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시장은 과거부터 존재해 온 원격지 상업이 발전된 것이지만 일단 산업 혁명이 개시되어 자본주의적 공업으로부터 다량의 생산물이 쏟아졌을 때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유통 측면의 전제 조건 을 형성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노동력의 측면

 지역별 시장권을 일구어 나간 주요 세력이었던 자영 농민, 자영 수공업자 층의 형성 과정이 이들의 경제적 자립화 과정이었다고 한다면, 때를 같이하여 농촌 지역에 광범하게 출현한 빈민, 유랑민, 각양 각색의 노동자들(품팔이꾼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한 것이다.)이 기계제 대공업에 종속되어 간 과정은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노동력 공급이라는 측면에서 준비해 가는 과정이었다. 이는 두 차례에 걸친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완성된다. 인클로저 운동은 모직물 무역이 주는 막대한 이익에 의해 촉발되었는데, 모직물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무역 품목의 하나로서 영국의 해상 무역 독점하에서 실로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모직물의 해외 수요가 확대되고 그 이익이 증대할수록 양모의 안정적인 대량공급이 절실히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대토지 소유자들은 양떼를 방목하기 위해 농민들에게서 몇 백만 에이커의 토지를 강탈하였으며 많은 농민들은 토지에서 쫓겨나 유랑길에 올랐다. 영국의 전원이 아름다운 녹색의 풀밭으로 변해 갈수록 농민들의 고통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에 대해 토마스 모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양은 본래 몹시 양순하여 먹이를 조금만 주어도 만족스러워 했는데 지금은 아주 탐욕스럽고 흉포해졌으며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한다.

 물론 이 과정은 순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어서 도처에서 인클로저에 저항하는 농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애초 대토지 소유자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인클로저 운동은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치자 정부와 의회의 후원하에 더욱 강력하게 추진되었고 농민들의 저항은 결국 분쇄되고 말았다.

-화폐 자본의 축적

 한편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풍부한 노동 공급과 함께 다량의 화폐가 사전에 축적되어야 한다. 자본축적을 위한 화폐적 부의 원천은 다양한 것이었다. 우선 영국 상인들은 상품 무역의 독점과 반문명적인 혹인 노예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수중에 넣고 있었다. 이와 함께 영국은 식민지 약탈과 해상 약탈(도둑질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고리 대금업 등으로 대량의 화폐를 끌어 모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자본 축적 원천은 봉건 경제의 붕괴 과정에서 등장한 다양한 자영 농 밀 자영 수공업자층 중에서 성공한 부류들이 보유한 소규모 자본이었는데 이들 중 사업 감각을 가진 이들은 산업 혁명이 시작되자 재빨리 다양한 공업 분야에 뛰어들어 공업의 주역으로 변신한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 혁명의 전제 조건인 풍부한 노동 공급과 다량의 화폐 자본이라는 면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산업 혁명은 왜 면공업에서 불이 붙었을까 ?

 산업 혁명 이전에 영국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던 모직물은 매뉴팩처 방식으로 생산된 사치품으로서 주된 수요자가 해외에 있었다. 반면 면직물은 일상적인 의생활에 이용되는 대량소비형 생필품이었으며 주로 내수 시장을 겨냥한 생산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면직물의 이러한 특징이 곧바로 자본주의적 공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봉건 경제하에서도 면직물은 이미 생산되고 있었고 이는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 나아가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유독 영국에서 면직물 공업이 산업 혁명의 시발점을 이루게 되었던 것은 왜일까? 봉건 경제하에서 면직물은 주로 농업과 수공업이 분리되지 않은 장원 경제 단위로 자급 자족되고 있었다. 따라서 면직물이 대량 생산된다 할지라도 마땅한 국내 시장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면직물의 자급 체계가 이미 무너지고 다수 국민들은 시장에서 면직물을 구입해야만 했으며 면직물의 시장 생산이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시작되고 있던 참이었다. 방대한 수요 시장의 형성은 약간의 자본과 기술 지식을 가진 중산 계층(초기 산업 자본가)에게 구미가 당기는 돈벌이 기회를 주었다. 하아그리브스, 아크라이트, 크롬프튼 등은 출신 배경은 약간씩 달라도 모두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고 그 변화를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바야흐로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둘도 없는 기회가 온 것이다. 누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얼마나 팔지, 그리고 얼마나 적은 노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이것이 성공의 열쇠였다. 기술 혁신의 경쟁이 불붙었다. 방적기와 직조기의 연이은 혁신이 이루어졌고 이는 다시 값싸고도 능률적이며 지리적 제한에 구애되지 않는 새로운 동력원으로서 증기력과 증기 기관의 혁신을 촉발했다. 또 기계와 증기 기관의 보급에 따라 철강업과 기계 공업의 기술 혁신이 그 뒤를 이었으며 1850년대의 철도, 선박 등의 수송 혁명에 이르러 산업 혁명은 완성을 보게 된다. 이와 함께 과거의 전통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근대 산업 사회가 경제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산업 혁명의 빛과 그늘

 프랑스의 석학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산업 혁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맨체스터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이 도시의 노동자 거주 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공장 폐수로 오염된 시커먼 강물을 보면서 맨체스터와 산업 혁명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더러운 하수구로부터 전세계를 비옥하게 만드는 인간의 땀의 강물이 흘러나오며 순수한 황금도 흘러나온다. 인간이 가장 애써 이룩한 이 문명이 그 기적을 이루는 바로 이곳에서 인간은 야만인으로 되어 버렸다."

 확실히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생산력은 인류에게 빈곤과 야만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을 가져다 주었다. 인간 생활이 더 편리하고, 더 안전하며 풍요롭게 될 가능성이 활짝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었을 뿐이었다. 현실은 어떠했는가?


현실은 어떠했는가 ?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태

 여성과 아동 또한 훨씬 적은 시간과 노력으로 조작법을 배울 수 있는 기계의 보급이 가속화됨에 따라 전통적인 수공업 기술을 사용하던 남성 숙련 노동자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산업 자본 가들은 인건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다루기 쉬운 노동력을 대량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최저 12시간에서 16시간 심지어 20 시간에 이르는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이 부인과 아동들을 포함한 노동자 전체를 괴롭혔고 극도의 저임금으로 노동자 가정은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첫머리에서 본 문명화된 대영제국 소년들의 어처구니없는 교육 상태가 이제는 납득이 될 것이다.

-노자 대립의 격화

 산업 혁명 초기에 노동자들은 아무런 제도적 보호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노동조합 또한 존재하치 않았기 에 자본가들의 무제한적인 이윤 동기에 의해 큰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자각이 싹터감에 따라 노동자와 자본가의 극한 대립이 온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식민지 수탈의 강화

 산업 혁명이 초래한 또 다른 중요한 영향은 식민지의 고통이다. 이전에는 군사력을 앞세운 단순한 약탈과 무차별한 원주민 학살이 식민지 지배의 내용이었던 반면,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식민지의 경제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본국의 공업 생산물의 수출 시장이자 원료의 공급 기지로서 식민지는 더욱 체계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서유럽 국가들 사이에 본격화됨으로써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식민지 민족들의 고통스런 역사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면직물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인도의 가내 수공업적인 직포업은 궤멸 당했고 영국 면공업에 값싼 원료를 공급하기 위해 북아메리카의 흑인 노예 수입은 산업 혁명과 함께 더욱 확대되었다.

 우리는 산업 혁명의 개략적인 전개 과정과 함께 그 양면성을 살펴보았다. 돌이켜보건대 인류는 산업 혁명을 거부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산업 혁명이 가져온 다수 인간의 고통과 식민지의 비참한 운명을 흔쾌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현대 산업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여전히 산업 혁명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음의 질문은 단순히 과거를 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산업 혁명의 좋은 측면을 발전시키고 나쁜 측면을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는가?

 산업 혁명이 낳은 결과의 양면성을 생각하면서 다음 글을 읽고 기계 파괴 운동을 평가해 보자.

 단순한 노동이 자본가의 지휘 아래 기계의 운동에 따라 작업하게 됨에 따라 인간 노동이 기계의 부속물처럼 되어 버렸다, 중세 수공업의 장인 제도에서는 사장(師匠), 수습 장인의 서열 관계에도 불구하고 인간 관계에서는 온정과 협조가 있었다. 그러나 자본가적 노동의 성립과 더불어, 수공업의 숙련 노동과는 달리 단순 노동이 기계의 운동에 봉사하면 되게 되었다. 이에 노동의 권위는 상실되고 노동자의 지위는 저하되었다, 때문에 수공업자 숙련공은 기계를 증오했다. 그들은 기계에 밀려나서 일터를 잃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실질 임금이 저하하여 생활이 곤란하게 될 때, 왕왕 기계 파괴 운동(러다이트 운동)에 나섰다. 노팅검에서는 메리야스 기계를, 코크셔에서는 면업의 역직기를, 요크셔에서는 양모 공업의 절취기를 파괴했다. 1811-1812년에 러다이트 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소란으로 발명가중 더러는 국외로 피난하기도 하였다. (최종식 「서양 경제사론」중에서)


도움말

 이 같은 소란은 삶을 위한 본능의 폭발이긴 하였지만, 하나의 넌센스였다. 먼저 이전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거대한 생산력을 인류에게 가져다 준 점에서 산업 혁명은 발전적인 의의를 지닌다. 이로써 인간은 빈곤과 야만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이는 아직 현실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빈곤, 여성과 아동 노동의 가혹한 착취와 장시간 노동 등은 산업 혁명에 의해 유발된 인간의 새로운 불행이었다. 또한 다수 국민이 불건강한 생활 주거 환경과 무교육 상태에 방치되었다. 어떤 노동자들은 이러한 모든 불행의 원인이 기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산업 혁명이 인류에게 가져다줄 풍요와 행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차츰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이 기계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산업 혁명으로 굳어진 자본가와 노동자 관계라는 새로운 인간 관계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과도한 인간 혹사를 저지하는 사회 입법을 만드는 노출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1833년 일반 공창법이 제정되고 1847년에 와서는 10시간 노동, 여성과 아동의 노동 시간 제한 및 야간 근로 금지를 법제화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노동자의 정치 참여를 위한 차티스트 운동과 경제적 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 조합 운동 등이 생겨났다


출처 : http://www.sejong.hs.kr/jdlee/tip.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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