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종합)

from 역사이야기/정리 2008. 7. 17. 09:13

 조선 후기에는 극히 일부의 지주가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대다수의 농민들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농업기술이 발전하고 한 사람이 맡을 수 있는 경작 면적이 크게 늘어나자 점차 소작지마저도 얻기가 어려워졌다. 여기에 군수와 아전들의 횡포는 농민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농민들은 이듬해 심을 종자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식량까지 빼앗기기 일쑤였다.

 이러한 때 당시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새로운 반성이 일어났다. 이 시기는 성리학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때였다. 성리학에서의 우주와 인간을 탐구하는 철학도 중요하고 삼강과 오륜을 펼치는 예학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로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당시의 현실을 이겨 나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와 같은 생각이 실학자와 실학을 낳게 했다.

 실학자들의 연구는 사회 모든 부문에 걸쳐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학자들의 연구를 있게 한 배경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의 흐름으로 갈라진다. 하나는 농업을 중요시하는 중농적 실학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상공업을 중요시하는 중상적 실학사상이다.


토지는 농민에게

─ 중농적 실학사상 ─

 중농적 실학자들은 사회 개혁의 핵심이 토지 문제에 있다고 보았다. 이에 속하는 학자들로서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개혁 이론은 '땅은 농민에게 주어야 한다'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이들은 일하지도 않는 양반 지주들이 단지 땅을 빌려준 대가로 수확의 절반을 거두어 가고서는,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줌으로써 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그 위에 조세제도,군사제도의 기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중농적 실학자들의 개혁 방안은 토지제도 개혁론이 그 핵심이 되고 있다.

 유형원은 토지 문제 해결 방안으로 ‘균전제’를 주장하였다. 균전제는 원래 집집마다 균등하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제도인데 유형원은 사농공상에 따라 차등있게 토지를 나누어 주자고 하여 성리학적인 신분 관념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익은 균전제를 시행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어, 실현 가능한 방안으로서의 한전제를 주장하였다. 그는 균전제를 시행했을 경우 한 집 마다 돌아가는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하고 현재 영업전 보다 많은 토지를 가진 사람은 팔수만 있고 영업전 보다 적은 토지를 가진 사람은 살 수만 있도록 하여, 현실 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되 장기적으로는 균전제를 시행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으로서 이 한전제를 주장하였다.

 토지제도 개혁론은 정약용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젊은 시절 자신의 문제 의식이 잘 드러나 있는 ‘전론(田論)’에서 그는 ‘여전제’를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균전제의 경우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토지를 받게 되어 지주 소작이 다시 생겨날 소지가 있고, 한전제의 경우 남의 이름을 빌어서 사고 파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고 하면서 마을 단위로 공동농장을 만들어 누구나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일한 만큼 노동량에 따라 수확물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평소 ‘일하지 않는 놈은 먹지도 마라’는 그의 철학이 바탕이 된 것으로 양반 조차도 수확물을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혁신적인 제도였다. 그러나 이같은 급진적인 여전제가 현실적으로 시행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정약용은 그의 말년에 보다 실현 가능한 방안으로서 정전제를 내놓았다. 본래 정전제는 중국 주나라에서 실시된 제도였다. 주나라 정전제의 내용은 이렇다. 일단 일정한 면적을 가진 정사각형 모양의 땅을 우물 정(井)자로 나눈다. 그러면 모두 아홉 구역의 땅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여덟 명의 농부에게 각각 주변의 한 구역씩 나누어 준다. 나머지 중앙의 한 구역은 여덟 명의 농부가 같이 농사를 지어 나라에 세금으로 바친다. 이런 내용을 가진 주나라의 정전제는 비탈이 많고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의 실정에는 잘 맞지 않았다. 이에 정약용은 주나라의 토지제도를 보완하여 우리 실정에 맞도록 한 정전제를 구상하였다. 그는 정전제의 원리를 살려 산기슭이나 비탈진 곳에 있는 조각 땅은 서로 보태어 넓이를 기준으로 구역을 나누자는 주장을 폈다. 또한 현실적으로 정전제를 한꺼번에 실시할 수 없으므로, 국가가 장기적으로 지주로부터 땅을 사들여 정전을 설치하고 아직 사들이지 못한 땅에서는 소작지만이라도 균등하게 분배하여 토지 소유의 평등을 이루자고 주장하였다. 지주전호제의 개혁과 함께 농민층 분화로 인한 사회 혼란을 막아 보자는 주장인 셈이다.

 중농적 실학자들은 일찍이 중앙의 권력으로부터 밀려나 농촌에 정착한 남인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어두운 농촌의 현실과 농민생활의 어려움을 직접 보고 듣는 가운데 자신들의 학문을 이루어 나갔다. 적당히 세금을 줄여주는 방법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농민에 대한 애착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들의 학문하는 태도는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부국강병의 길

─ 중상적 실학사상 ─

 중상적 실학자들은 상공업을 발전시켜 나라의 부(富)를 늘리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이에 속하는 학자들로서는 유수원,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들은 상공업이 발전하여 나라가 부강해지면 자연히 농민들의 생활도 나아진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재산없고 덕망 없음을 안 사람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물품의 교역에 종사하며, 남에게서 얻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먹고 사는데 그것이 어찌 천하거나 더러운 일이겠는가?' 따라서 토지가 없는 농민은 도시로 가서 장사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중상적 실학자들은 당시에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에서 나왔다. 이들 대부분은 비록 높은 관직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관직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비교적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에 살았으며 외국 여행을 통하여 견문을 넓힌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그같이 나라를 부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가? 무엇보다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 점에서 이들 모두의 생각은 한결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상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는 각자의 주장을 달리했다. 중상적 실학사상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유수원은 상인이 주도하는 대자본의 육성을 첫째로 꼽았다. 그는 상인들이 서로 자본을 합하여 생산과 판매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홍대용은 기술문하의 혁신과 성리학의 극복이 상공업 발전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사농공상의 신분적 차별 속에 상업이 말업(末業)으로 천시되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박지원은 농산품을 상품화해서 적극적으로 유통시키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 점이 같은 농업 문제를 보는 중농적 실학사상과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즉 중농적 실학사상이 토지 분배 문제에 중점을 두는 반면 중상적 실학사상가들은 농업 생산력의 향상과 농업 생산물의 상품화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청에 다녀온 후 그는 상공업에 더욱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그는 유통경제의 발전을 위해서 수레나 선박의 이용과 함께 화폐의 유통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의 생각과 주장은 그의 소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양반전’에서는 양반 문벌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으며 ‘허생전’에서는 비록 매점매석이긴 하지만 ‘돈을 버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로써 ‘경제가 돌아가는 이치’를 일러주고 있다.

 박제가는 '북학파'라는 말을 낳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상공업이 크게 발전한 청나라와 장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찍이 중국차를 실은 배 한 척이 남해에 표류한 적이 있었다. 그뒤 온 나라에서 10년 동안이나 차를 마시고도 지금까지 남아 있음을 보았다'면서 '먼 지방의 물자가 통한 다음이라야 재물을 늘리고 백 가지 기구를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통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소비와 생산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소비는 생산의 촉진제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우물물의 물은 퍼내지 않으면 고이지 않는다. 퍼내는 것이 소비라면 고이는 것은 생산이라는 것, 즉 적당한 소비는 상공업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그의 주장은 그가 펼치는 경제이론이 이미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중상적 실할사상은 학문의 목표를 상공업 발전과 부국강병의 실현에 두고 있다. 이는 농업에 바탕을 둔 중세사회를 지양하고 상공업에 바탕을 둔 근대사회로의 발전을 도모하는 역사 발전의 법칙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은 이후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고 또한 개화사상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중농은 분배론, 중상은 성장론

중농적 실학사상과 중상적 실학사상은 모두 다 당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방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둘 간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중농적 실학사상이 '우리가 가진 빵을 서로 잘 나누어 먹자'(분배론)는 것이라면 중상적 실학사상은 '우리가 먹을 빵을 늘려가자'(성장론)는 것이다. 분배에 힘을 기울이면 빈곤의 평등이 될 수가 있고 성장에 힘을 기울이면 빈부의 차이가 커질 수 있다. 이렇듯 분배와 성장의 문제는 조화시키기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다.

 실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처지에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주장하였으나 그들 대부분이 몰락 남인이거나, 권력을 잡고있던 노론에 속해있었다 하더라도 낮은 지위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권력자들에 의해 무시되어 이론과 주장에 그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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