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란(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문예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양반 계층내의 부녀자가 문예에 참가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많은 소설 문학의 창작과 전승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양반 서류(서자, 서얼)들 가운데에서도 공명 위주의 한문학을 탈피하고 국문학 활동을 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 단적인 예가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다.


혁명을 꿈꾸며
- 허균의 홍길동전

 홍길동은 연산군 때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었다. 『왕조실록』 연산군조에는 홍길동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강도 홍길동은 옥관자를 붙이고 붉은 띠를 두르고 당상관 차림의 고관이 되어 첨지 행세를 했다. 따라서, 버젓이 관청 출입을 하며 온갖 짓을 다했다. 그리고, 대낮에 떼를 지어서 횡행하는데, 모두 무장을 하였다.

 홍길동은 전무후무한 강도로서 재주가 비상하여 ‘홍길동이 재주’라는 말을 낳을 정도였는데 명종 때 임꺽정과 같은 의적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허균은 실존 인물이었던 이 홍길동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며 『홍길동전』이란 소설을 만들어 냈다. 거기에는 적서차별의 철폐, 탐관오리에 대한 응징, 새로운 이상사회(율도국)의 건설에 대한 그의 열망이 잘 나타나 있다.
『홍길동전』은 현실참여와 정치개혁을 위해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허균은 실제로 혁명을 꿈꾸었고, 참위설에 의하여 청의 흥기와 다가올 혼란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또한 추종자들로 하여금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하여 서울 주민의 절반 이상이 피난하는 소동을 빚게 한 장본인이었다. 허균도 당시 대부분의 서얼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서얼의 관직 진출을 막고있는 사회의 불공평한 대우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균은 항상 ‘나라에 큰 사변이 났다.’고 떠들어 대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혁명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혁명적 기질 때문에 죽음을 당하였지만 그의 문학적 재질에 대해서는 서포 김만중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쓴 『홍길동전』은 그의 문학적 재질뿐 아니라 사회 혁명사상까지 담고 있어서 조선의 문학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고 있다. 더욱이 최초로 쓰여진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와 영향력은 대단히 큰 것이다.


관에 대한 민중의 항거
- 춘향전

『홍길동전』이 나타난 1세기 후에 판소리가 등장하였다. 광대가 한 편의 이야기를 노래와 아니리(이야기)로 부르는 판소리는 서민문학과 양반 사대부의 문예를 모자이크적인 수법으로 엮어 국민문학적인 성격을 띠었다. 따라서 판소리는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사대부는 물론, 일반 민중에게도 크게 환영을 받았다.
 판소리 중 가장 많이 불리운 것이 바로 『춘향전』이다. 『춘향전』은 조선 말기에 가장 사랑을 받았던 판소리였다. 전라도 남원을 중심으로 책방 도령 이 도령과 춘향 사이에 사랑이 싹트고, 이 도령이 서울에 올라간 다음에 신임 사또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하고 정절을 지킨 춘향이, 과거에 합격하여 암행어사로 내려온 이 어사와 다시 만난다는 줄거리이다.
 그러나 일개 관기(기생)에 불과한 춘향이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실은 곧 관에 대한 민중의 항거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불가능하게까지 여겨지는 춘향의 항거를 통하여 듣는 이들에게 속시원함을 안겨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춘향전』이 민중의 환영을 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춘향전』은 한말에 이르러 원각사 무대를 통하여 창극으로 만들어졌고 이해조에 의하여 『옥중화』로 출판되었다. 인쇄본의 보급으로 일반 대중은 판소리에 의하지 않고도 이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요새 글이 어지러운 것은 『열하일기』때문이다
- 박지원의 혁신적인 한문소설

 연암 박지원은 뛰어난 학자요, 천부적인 문장가였다. 그는 일찍이 경서와 역사서를 통독하고 천문 지리와 병법, 농업, 경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공부로 19세 때 벌써 학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박지원의 일생에 일대 전기가 된 것은 사신의 수행원으로 청에 다녀온 후였다. 그의 『열하일기』(정조 4년, 1780년)도 이 때 쓴 기행문이었다.
 박지원의 작품들은 그 표현이 지극히 섬세하고 또 재치와 익살을 교묘하게 구사하였기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폭발시켰다. 그의 한문학은 중국의 전형을 탈피한 이른바 한국적인 한문체를 확립하였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박 지원의 작품이 단지 새로운 문체로서만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열하일기』에 수록되어 있는 『허생전』을 한 번 보자. 돈벌이에 나선 허생이 당시 큰 부자였던 변씨를 찾아가 돈 만 냥을 빌렸다. 그리고 전국의 과실을 몽땅 사들여 값이 10배로 오른 후 되팔아 그 돈으로 농기구와 옷가지를 사들인다. 그것을 가지고 제주도에 가서 팔고 다시 그 돈으로 제주도의 말총(말꼬리, 갓 등을 만드는 원료가 됨)을 모두 사는 방법으로 수십 배의 이익을 보았다. 그 후 변산 땅에서 출몰하던 도적 2천여 명을 모아서 각각 돈 백 냥과 소 한 마리씩을 주어서 무인도를 개척하고 거기에 정착하게 한다. 때마침 일본 나가사끼에 큰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곡식을 싣고 가서 팔아 은 백만 냥을 벌어와 변부자에게 돈을 갚는다는 줄거리이다.
 이는 곧 당시 집권층 성리학자들의 정치적 무능을 통박하는 것이며 실학자 박지원이 구상한 부국강병책을 소설로 나타낸 것이다.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서 사회 개조를 위한 이상과 실천 가능한 방법을 예시했던 것이다.
 양 반 계층을 신랄하게 풍자한 『양반전』도 빼놓을 수 없다. 환곡을 1천 석이나 얻어먹고 갚지 못해 투옥될 지경에 몰린 양반이 그 고을 사또의 주선으로 자신의 양반 신분을 팔기로 했다. 한 돈 많은 상놈이 양반 신분을 사서 한동안 양반으로 행세하였다. 그러나 체면을 위해서 굶어도 배부른 척 해야 하고, 추워도 화롯불을 가까이하지 않는 그런 양반 노릇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양반’이란 신분 자체를 내던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양반전』은 양반층의 무능과 무위도식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다. 양반 상놈의 구분에 억매여 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이야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박지원의 소설은 형식과 내용의 양면에서 혁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고정관념을 깨는 새로운 문체, 웃음과 재치, 나아가 사회 개혁의 방향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 나라 근대정신의 토대가 되었다.


박지원의 필화(筆花) 사건

 박지원의 파격적인 문체는 정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그 때문에 일종의 필화(발표한 글이 말썽이 되어 화를 입는 것)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은 정조는 “요새 문장이 기이하고 희롱됨은 모두 박지원의 『열하일기』 때문이다. 만일 박지원이 바른 글을 지어서 『열하일기』의 죄를 씻지 않으면 큰 벌을 내리겠다.”고 한 것이다. 왕명이 하도 엄하여 박지원이 속죄의 뜻으로 글을 썼는데 그것이 또 명문장 중의 명문장이라 정조도 감탄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흥부전』에 나타나 조선 후기 농민들의 생활

『흥부전』을 보면 흥부 내외가 온갖 품팔이에 나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매기’, ‘밤짐 지기’, ‘담쌓는 데 자갈 줍기’, ‘오뉴월 밭매기’, ‘구시월 김장하기’, ‘삼 삶기’, ‘채소밭에 오줌 주기’, ‘못자리내 망초 뜯기’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그날그날 품을 팔아 살아가는 농민들의 고달픈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조선후기 지주 전호제의 확대와 농민층 분해로 소작지조차도 얻지 못하게 된 농민들이 대부분 임노동자로 전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문학 작품은 그 시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 주기도 하고, 그 시대 사람들의 감정과 풍습, 희망과 소원을 담고 있어 역사 이해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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