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전반에 일어났던 병자호란(인조 14년, 1636)은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전이었다. 몽고에 대한 항쟁이 40여 년간 계속되었고, 임진왜란에서는 7년간의 싸움 끝에 왜군을 격퇴한 데 반하여, 병자호란은 불과 2달만에 조선의 굴복으로 끝나고 말았다


7대한을 갚아주기 위하여

-명의 쇠퇴와 여진족의 흥기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금나라가 몽고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 후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은 명과 조선에 대하여 이중적인 종속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명대의 여진족은 건주, 해서, 야인 여진의 셋으로 갈라져 있었다. 명나라는 이 여진족에 대하여 무력과 회유의 양면정책을 취하면서 조선과 여진이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건주 여진의 누르하치가 서서히 여진족을 규합, 16세기말에 이르러 여진족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명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조공을 바치는 등 명에 대한 순종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여진이 강성해지는 반면 명의 국력은 날로 쇠퇴해 갔다. 잦은 군대 동원과 그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명의 몰락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1616년, 누르하치는 ‘대금(大金)'이란 국호로 후금을 건국한 후 명과 대항하는 정책으로 나아갔다. 1618년에는 그동안 명에게 당했던 '7대한'을 갚는다는 명분 아래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중국의 정세가 급변하였고 조선은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명분 보다는 실리를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

 1618년 심양의 군대가 패배하고 무순이 함락되자 명은 조선에 단련된 화기수(소총수) 7천을 준비해서 대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반면, 누르하치는 평안도 관찰사에게 군대를 파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은 광해군의 즉위를 도왔던 대북(북인의 한 갈래)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조선이 국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명의 후방을 수비한다는 측면에서 유익하다'고 하면서 명의 출병 요구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와주었던 일과 전통적인 대명 관계를 감안하면 원병을 파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명을 지원토록 하고 사태를 보아 후금과 강화하도록 밀지를 내렸다. 명을 도우러 떠난 강홍립은 1618년 사르후전투에서 후금군에 포위되자 그들에게 조선의 파병이 부득이했음을 설명하고 화평을 성립시켰다.

 누르하치의 목표는 요동을 확보하고 그곳을 발판으로 하여 명을 치자는 데 있었다. 따라서 북의 몽고와 남의 조선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조선의 파병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이 시기에 광해군은 후금에 대해 조선군의 파병이 본의가 아니었음을 이해시키려고 하였고 누르하치는 이를 기회로 정식적인 화평 관계를 맺어 조선의 확실한 보장을 받으려 하였다. 광해군은 이러한 후금의 의도를 간파하고 중립정책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나라를 보존하였다.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

-정묘호란

 그러나 1623년 서인들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대북 세력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반전되었다.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들은 광해군과 대북 정권의 중립적인 대외정책을 친명 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하였다. 조선의 친명 배금 정책과 함께 명의 장수 모문룡이 조선의 가도(평안도 철산 앞바다에 있는 섬)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후금은 크게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무렵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이괄이 자신만이 이등공신에 책봉된 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반정 실패 후 그는 후금으로 도망가 인조반정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서인정권을 응징할 것을 종용하였다.

 인조 4년(1626년), 왕자 시절부터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던 홍타이지(태종)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후금의 조선에 대한 정책도 변하기 시작하였다. 호전적인 홍타이지는 조선의 친명 정책과 모문룡의 가도 주둔을 문제삼으면서 조선에 쳐들어 왔다. 그는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을 걸고 3만 명의 군사를 일으켰다. (정묘호란, 인조 5년, 1627년)

 전쟁이 시작되자 후금군은 의주, 정주, 선천, 곽산 등지를 거쳐서 황해도 평산까지 육박해오면서 일부는 가도를 공격하였다. 이 사이 용골산성과 의주지방에서 정봉수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항전하였지만 후금의 군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하였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조선 정부 내에서 화의론이 대두하였고 후금 또한 장기 출병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국간에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후금은 강화 교섭 3일만에 '강화서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강화서약으로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맹(兄弟之盟:형제의 나라)'을 맺게 되었다.


오랑캐를 섬길 수는 없다

-병자호란

 정묘호란이 끝난 후 후금은 승전국으로서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식량을 내어 줄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명을 정벌할 병선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후금의 태종은 내몽고를 정벌하는 한편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대하여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신하의 나라)'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조선을 '아우의 나라'에서 '신하의 나라'로 만드려는 굴욕적인 요구였다. 당시 척화파의 강경론을 대표하는 홍익한은 이렇게 상소하였다. "신은 이 세상에 태어난 후로 오직 대명천자(大明天子)가 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랑캐를 섬긴다는 말은 어찌된 일입니까?" 이 말에는 오랑캐에 대한 굴복을 용납하기 어려웠던 점이 잘 나타나 있다. 후금의 무리한 군신관계 요구로 주전론이 대두하고 조선과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되어갔다.

 후금의 태종은 인조 14년,(1636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었다. 그 후 청의 태종은 조선에 대하여 왕자대신 및 척화 주장자들을 잡아 보내지 않으면 다시 조선을 치겠다고 위협하였으나 이미 척화론이 대세를 이룬 조선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명을 정벌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같은 해 12월 1일 만주.몽고.한인의 혼성병력 10만을 이끌고 조선 침략을 재개하였다.

 일찍이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민(民)에 대한 조직을 강화하여 이를 전투력으로 전화시키기 위해 '8기(八旗)제도'를 창안하였다. 이는 300정(丁)이 1니루,5니루가 1잘란,5잘란이 1구사(기:旗)로 구성되어 있는 병민일체의 사회조직이었다. 따라서 1기는 7,500명의 군사이니 팔기군은 모두 6만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팔기군은 깃발의 색깔을 가지고 부대를 구분하였는데 황.백.청.황의 4색에 각각 테두리를 두른 것과 두르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팔기군을 주력으로 하는 여진족의 기병은 우수한 기동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안주까지 쳐들어왔다. 조선 정부는 뾰족한 방어 대책을 찾지 못한 채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놓고 피난처를 정하기에 바빴다. 12월 14일 개성 유수의 급보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통과했음이 알려지자 종묘와 비빈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뒤이어 인조도 세자와 대신들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미 청군이 경기지방까지 들어와 강화도로 가는 길이 차단되자 인조는 급히 방향을 바꾸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강화도 피난 계획을 세우고 식량과 군비를 강화도에 집중시켰었다. 그러나 급작스런 상황의 변화로 인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당시 성내의 식량으로는 두 달을 버티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식수난은 더욱 심각했다. 청군이 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조선에 불리해져 갔다. 이러던 중 체찰사 김류가 여러 장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적진 돌파의 명령을 내려 성밖으로 나간 조선군이 청군의 매복 공격으로 대파당하자 사기마저 크게 꺾이게 되었다. 전국에 근왕병을 모집하였으나 이것마저 별다른 호응이 없자 피난 조선 정부의 논의는 점차 주화론으로 기울어졌다. 이 때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인조와 조선 정부는 전의를 상실하였다. 결국 청의 요구대로 척화 강경론자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을 결박지어 청진으로 보내고 항복의 뜻을 전하였다. 항복 교섭은 조선측의 주화론자 최명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인조 15년,(19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현재의 송파구 삼전동)에서 청 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을 치루었고 청군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김상헌 등 척화파의 주요 인물들을 묶어 심양으로 돌아감으로써 병자호란은 끝이 났다.


우리는 대로를 따라 한성으로 직행할 것이다

-호란에서의 패전 이유

 정묘호란이 발발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채 안되는 시점이었고,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은 정묘호란 이후 9년이 지난 뒤였다. 따라서 처음 여진과의 외교 문제가 일어났을 때 가급적 전쟁은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더구나 여진의 압력은 예고없이 쳐들어온 일본의 침략과는 달리 명과의 항쟁 과정에서 후방의 근심을 없게 하려는 조선 견제책이었기 때문에 대처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전쟁을 피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광해군의 실리적인 중립외교 정책은 현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서인의 권력 장악과 그에 따른 지나친 친명정책은 후금을 자극하여 정묘호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후 호전적인 청 태종의 즉위와 굴욕적인 군신관계 요구로 양국 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병자호란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두 번의 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전쟁의 위험성이 예고되어 조선군의 훈련 정도나 병기의 질이 청군에 비하여 뒤지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주전론이 우세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조선군이 일패도지한 까닭은 무엇인가?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기병인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하여 활을 가지고 적을 격퇴하는 장병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칼과 조총으로 근접전을 벌이는 왜군에 대한 대응 방법을 강구하기 위하여 포수(총),사수(활),살수(창,칼)의 세 가지 병종으로 구성된 삼수병체제를 개발하였다. 그러나 이 삼수병 체제는 북방의 여진과 싸우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산성 중심의 방어 전략과 청야작전의 실패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양대 호란에서 조선은 제한된 병력으로 서북 국경 지대 요진을 방어하여 침공군의 수도권 진출을 지연시키려고 하였다. 조선군은 보병 중심의 소수 병력으로 기병 위주인 다수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거점 방어가 효과적이라는 판단 아래 의주의 백마산성, 황주의 정발산성, 평산의 장수산성 등을 보수하여 그 지역의 병력을 산성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이 산성에서 항거하면 우리는 대로를 따라 한성으로 직행할 것이다. 조선의 산성이 우리의 진로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말한 바대로, 청군은 조선의 산성을 무시하고 빠른 기동력으로 대로를 따라 한성으로 진출하여 조선군의 지휘체제를 마비시킴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산성 중심의 방어전략을 무력하게 만든 주원인은 청야작전(군량과 무기를 모두 산성으로 옮기고 미처 옮기지 못한 것들은 태우거나 파괴하는 것)의 실패에 있었다. 청군은 두 차례의 조선 침공에 있어서 그들의 보급품, 특히 군량 확보를 위한 사전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군이 청야작전을 철저히 실시하지 않고 다투어 산성에 들어가려고만 한다는 점을 간파한 까닭이었다. 즉 청군은 그들의 모든 보급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조선 내지에 깊숙이 대군을 이끌고 진입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 결과, 정묘호란 당시에는 의주로부터 평산에 이르는 서북 변방 각지의 막대한 관곡과 병기가 모두 후금군의 손에 들어갔다. 따라서 후금군의 진영에는 군량이 남아돌 지경이어서 그들 본국의 군량에 충당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병자호란 때에도 조선측은 끝내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오랑캐에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하여

-북벌론의 대두

 여진족에게 굴욕을 당함으로써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반청 감정은 수그러 들지 않았다. 병자호란에 이어서 청은 명나라마저 정복함으로써(인조 22년, 1644년) 중원의 새로운 정치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전쟁에서의 패배로 양국 간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나 조선에서는 내심으로 반청 감정이 응집되어 북벌론(청을 정벌하자는 논의)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이 북벌론은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효종으로 즉위하면서부터(1649년) 북벌계획으로 확정되어 본격화되었다.

 효종은 즉위 후에 반청 척화파 계열의 인물을 등용하고 송시열의 적극적인 보좌를 받으며 설욕을 위한 본격적인 북벌계획을 준비하였다. 북벌계획의 요점은 군비증강에 있었다. 어영청, 수어청의 부대를 강화하고 국왕의 친위군인 금군을 강화하는 등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했으나 재정난으로 전부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효종의 이러한 북벌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고, 북벌 준비로 훈련된 군대는 오히려 청이 러시아와 싸웠던 두 차례의 나선정벌(1654년, 1658년)에 동원되기만 하였다. 효종이 죽자 이 북벌론 자체도 쇠퇴하였으며 재정적인 부담만 남기고 말았다.


※도움글 - 찢은 자도 옳고 주워 붙이는 자도 옳다

 병자호란 중에 남한산성에 갖혀 있던 조선 조정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청군에게 화친을 청하는 국서를 보내기로 했다. 주화파 최명길이 그 국서를 쓰는데 척화파인 김상헌이 달려와서 그것을 찢어 팽개치며 울분을 토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최명길이 태연하게 김상헌이 찢어버린 국서를 주워 모아서 풀로 붙였고 청과의 강화가 성립되었다.

 그후 사람들은 ‘찢은 자도 옳고 줏은 자도 옳다(裂之者可 拾之者可)’라고 하며 양시론(兩是論)으로 두 사람의 참뜻을 새겼다고 한다. 이것만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식의 흑백논리가 판을 치는 요즈음에 한 번쯤 새겨볼 만한 이야기이다.


※도움글 - 누르하치가 내세운 7대한

출처 -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7&eid=baPEGA+ItPv9SlMWUp/+HEVTmSqoFlsk&ts=1090565798


1)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이 명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뮤 이유 없이 명 정부가 그들을 죽였다.
2)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는 과정에 명이 여허(Yehe 葉赫)부족의 편을 들었다.
3) 후금은 명의 변방 장군과의 약속에 의하여 국경을 넘어온 사람을 죽였는데, 오히려 명 조정이 이에 대하여 후금에게 책임을 묻고 후금의 사절을 죽였다.
4) 여허 부족이 공주를 누르하치에게 보내기로 했는데, 명의 관리가 공주를 납치하여 명과 우호관계에 있는 몽고에게 주었다.
5) 후금이 자하(紫河), 삼차아(三岔兒), 무안(撫安) 등지를 개간하려 하자 명이 여진족을 쫓아냈다.
6) 명은 여허와 후금의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계속해서 여허에게 후금을 중상모략했다.
7) 명은 후금과 여러 부족들과의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특히 여허에게 의심과 증오감을 갖도록 조장하고 명과 여허부족이 함께 후금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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